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쇳돈 2만 개를 종이 한 장으로 바꾼 사람들

서기 991년 중국 쓰촨 지역의 시장에서는 비단 한 필을 사려면 쇠로 만든 동전 2만 개가 필요했습니다. 당시 쓰촨에서 쓰던 큰 철전 한 개의 무게가 3전에서 4전, 그램으로는 열 몇 그램이었습니다. 단순히 곱해보면 2만 개는 200킬로그램을 훌쩍 넘습니다. 비단 한 필을 사겠다고 어른 세 사람 몸무게에 해당하는 쇳덩이를 시장까지 끌고 가야 했다는 뜻입니다.

이 불편함이 인류 최초의 지폐를 만들어냈습니다. 세계 최초의 종이돈으로 기록된 교자(交子)는 거창한 금융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돈이 너무 무거워서 생긴 발명품이었습니다. 그리고 1023년 북송 정부가 교자 발행을 직접 맡으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가 종이를 돈이라고 선언한 사례가 됩니다.

흥미로운 건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종이돈은 한 번 태어나 쭉 쓰인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몇 번씩 태어나고 몇 번씩 무너졌습니다. 그 실패 기록들이 오늘 우리가 쓰는 돈의 설계도를 만들었습니다.

구리가 없던 땅의 쇳돈

쓰촨이 쇳돈을 쓴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지역에 구리가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송나라 정부가 이 지역을 장악한 뒤 청동 화폐를 철전으로 바꾸는 정책을 쓰면서 쇳돈 사용이 굳어졌습니다. 문제는 쇠와 구리의 값 차이였습니다. 978년 기록을 보면 철전 한 개의 가치는 구리 동전의 10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993년에는 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토지세를 낼 때는 철전과 청동전을 1대 1로 계산해줬지만,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철전 열 개를 내야 청동전 한 개로 인정받았습니다. 같은 돈이 쓰는 장소에 따라 열 배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세금은 가볍게 걷히고 장사는 무겁게 눌리는 구조였습니다.

발행량도 어마어마했습니다. 1005년 쓰촨의 네 곳 주전소는 한 해에 철전 50만 관 이상을 찍어냈습니다. 돈의 가치가 낮으니 양으로 메워야 했고, 양이 늘어날수록 한 번의 거래에 들어가는 무게가 늘었습니다. 이쯤 되면 화폐가 거래를 돕는 도구라기보다 거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가까워집니다.

열여섯 상인의 공동 발행

해결책을 찾아낸 쪽은 관청이 아니라 상인들이었습니다. 쓰촨의 한 민간 상회가 먼저 방법을 내놨습니다. 손님이 쇳돈을 맡기면 맡긴 액수를 적은 종이 증서를 써주고, 나중에 그 증서를 가져오면 쇳돈을 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쇳돈을 되찾아가는 대신 증서 자체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기 시작했습니다. 보관증이 돈이 된 순간입니다.

초기 교자에는 통일된 규격이 없었습니다. 발행하는 상회마다 종이 모양과 적는 방식이 달랐고, 그 상태로 약 5년이 흘렀습니다. 받는 사람이 그 종이를 신뢰할 수 있는지 매번 판단해야 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쓰촨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열여섯 개 상회가 손을 잡고 공동으로 교자를 발행하는 기구를 세웠습니다. 규격을 하나로 맞추고, 신용을 한데 모은 것입니다.

그래도 무너지는 곳이 생겼습니다. 맡아둔 쇳돈보다 많은 교자를 써준 상회, 다른 사업에서 손실을 본 상회가 차례로 부도를 냈습니다. 그 상회가 발행한 교자를 들고 있던 사람들은 종이만 남았습니다. 발행 주체의 신용이 곧 그 종이의 가치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가장 비싼 방식으로 배웠습니다.

1023년, 정부가 인쇄기를 가져가다

민간 발행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내자 북송 정부가 개입했습니다. 1023년, 교자 발행을 국가가 전담하는 관청인 교자무(交子務)가 설치됐습니다. 이듬해인 1024년에는 정부가 규격을 정한 첫 공식 교자가 발행됐습니다. 액면은 1관(700문), 1민(1,000문)부터 10관까지였습니다. 세계 최초의 정부 발행 지폐로 기록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주목할 만한 건 북송 정부가 지금의 중앙은행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우선 교자에 유효기간을 넣었습니다. 발행한 교자는 2년이 지나면 효력이 끝나고 새 교자로 바꿔야 했습니다. 이 기간은 1199년에 3년으로 늘어났습니다. 오래된 종이가 무한정 돌아다니지 않게 하고, 발행 총량을 주기적으로 점검하려는 장치였습니다.

발행 한도도 정했습니다. 유통되는 교자의 총액을 1,255,340민으로 제한한 것입니다. 다만 이 금액을 뒷받침하는 실제 구리 동전은 그 5분의 1 수준이었습니다. 맡긴 돈만큼만 증서를 써주던 민간 방식에서 벗어나, 준비금보다 많은 돈을 발행하는 지점에 이미 도달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모든 중앙은행이 서 있는 자리가 바로 거기입니다.

교자는 이후 여러 차례 다른 지폐로 대체됐습니다. 1256년 화폐 개혁에서는 남아 있던 교자와 쇳돈을 회자(會子)로 바꿔주면서 교자의 역사가 정리됐습니다. 230년 넘게 이어진 실험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본 완벽한 연금술

원나라 시대에 중국을 찾은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여행기 제2권에 지폐만을 다룬 장을 따로 넣었습니다. 제목은 '대칸이 나무껍질을 종이처럼 만들어 나라 전역에서 돈으로 통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재료까지 적었습니다. 뽕나무 껍질 안쪽의 흰 속껍질이었습니다.

그가 인상적으로 본 것은 제조 공정이 아니라 발행 절차였습니다. 수도 칸발리크의 조폐 기관에서 만든 종이를 여러 크기로 자르고, 담당 관리들이 각자 이름을 쓰고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이 '순금이나 순은을 다루는 것과 똑같은 격식과 권위로' 진행된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위조하면 사형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남긴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것입니다. 대칸은 비용을 거의 들이지 않고 이 돈을 만들어내므로, 그가 연금술의 비밀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대목입니다. 종이에서 부를 만들어내는 일이 유럽인에게는 마법으로 보였던 셈입니다. 다만 폴로가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연금술로 만든 금은 늘어나도 값이 떨어지지 않지만, 종이돈은 늘어나면 값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원나라 지폐는 꽤 정교하게 출발했습니다. 1260년에 발행된 중통초(中統鈔)는 귀금속이 뒤를 받친 역사상 첫 지폐로 꼽힙니다. 지정된 기관에 가져가면 액면의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은으로 바꿔줬습니다. 그러나 1270년대 후반부터 이 교환은 이름만 남기 시작했고, 1310년 이후에는 은과의 연결이 사실상 끊어진 순수 지폐 체제가 됩니다.

끊어진 자리를 메운 것은 전쟁 비용이었습니다. 특히 내전으로 재정 수요가 커질 때마다 발행이 늘었습니다. 1346년부터 1355년까지 10년 사이 물가는 대략 두 배가 됐고, 1352년에 새로 발행된 지정초(至正鈔)는 발행량이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원나라는 1368년에 무너졌습니다. 지폐 하나로 왕조가 끝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재정이 지폐 인쇄에 의존하기 시작한 시점과 왕조의 말기가 겹친다는 사실은 남습니다.

명나라가 지폐를 포기한 이유

폴로가 경탄한 그 시스템은 결국 무너졌습니다. 명나라는 1375년 홍무제 때 대명보초(大明寶鈔)라는 지폐를 발행했습니다. 이번에는 교자가 갖췄던 장치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금이나 은 같은 준비자산이 전혀 없었고, 발행 총량에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습니다.

결정타는 정부 자신이 놓았습니다. 세금을 걷을 때 자기가 발행한 보초를 받지 않기 시작한 것입니다. 발행한 쪽이 받지 않는 돈을 백성이 받아줄 이유는 없습니다. 1535년 기록을 보면 보초 1관이 동전 0.28문 값으로 거래됐습니다. 액면이 1,000문인 종이가 1문의 3분의 1도 안 되는 값에 거래됐다는 뜻입니다.

홍치제와 정덕제 대에 이르러 명나라는 지폐 발행과 사용을 아예 폐지했습니다. 그 뒤 중국은 약 400년 동안 지폐 없이 지냈습니다. 다시 지폐가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으로 재정이 바닥난 청나라 함풍제 때였습니다. 종이돈을 가장 먼저 발명한 나라가, 종이돈을 가장 오래 포기한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첫 지폐, 그리고 사형선고

유럽의 사정도 쓰촨과 비슷했습니다. 은이 부족한 스웨덴은 구리를 두드려 만든 판을 돈으로 썼습니다. 1644년에 만들어진 10달러 구리판은 무게가 19.7킬로그램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실제로 유통된 가장 무거운 주화로 기록돼 있습니다. 같은 가치의 은화보다 100배가량 무거웠으니, 큰 거래를 하려면 수레가 필요했습니다.

리가 출신으로 1647년 스웨덴에 건너온 요한 팔름스트루크가 여기서 사업 기회를 봤습니다. 그는 1656년 특허장을 받아 스톡홀름 은행을 세웠고, 1661년 7월에서 8월 사이에 크레디티브세델이라는 증서를 발행했습니다. 현대적 의미의 유럽 최초 지폐로 꼽히는 것이 이것입니다. 특정 예금과 일대일로 묶이지 않고, 은행이 요구하면 바꿔준다는 믿음만으로 돌아다녔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였습니다.

무너지는 과정도 교과서적이었습니다. 1660년 정부가 구리판 돈의 가치를 깎아내리자, 예전의 값나가는 구리판을 되찾으려는 예금자들이 몰렸습니다. 은행은 내줄 구리가 부족했고, 그 자리를 증서를 더 찍어서 메웠습니다. 증서 값은 액면보다 6퍼센트에서 10퍼센트 아래로 떨어졌고, 믿음이 사라지자 은행은 1668년 문을 닫았습니다.

팔름스트루크는 부실한 장부 관리 책임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형은 집행되지 않았고 감옥에 갇혔다가 1670년 풀려났으며, 이듬해 6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럽 최초의 지폐를 만든 사람의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그 은행의 파산이 계기가 되어 같은 1668년, 지금까지 이어지는 스웨덴 중앙은행 릭스방크가 세워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천 년 동안 세 대륙에서 반복된 이야기의 구조는 거의 같습니다. 무거운 돈이 불편해서 종이 증서가 생기고, 증서가 편리해서 널리 쓰이고, 널리 쓰이자 발행자가 맡아둔 것보다 많이 찍고, 그러다 누군가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순간 전부 드러납니다. 쓰촨의 상회도, 명나라 조정도, 스톡홀름의 은행도 같은 지점에서 넘어졌습니다.

그래서 교자의 설계가 지금도 눈에 들어옵니다. 발행 한도를 숫자로 못 박았고, 유효기간을 두어 정기적으로 되돌아보게 했고, 준비금을 따로 쌓았습니다. 준비금이 발행액의 5분의 1에 그쳤다는 점에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반대로 준비금도 한도도 없이 출발한 대명보초는 160년 만에 사실상 0에 수렴했습니다.

투자자의 자리에서 곱씹을 대목은 '무엇에 투자했는가'만큼 '그것이 무엇으로 값이 매겨지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수익률을 계산할 때 쓰는 단위 자체가 누군가의 약속 위에 서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어떤 규칙으로 관리되는지는 평소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지갑에 든 종이와 휴대폰 속 숫자에는 금도 구리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교자를 들고 다녔던 쓰촨 상인이 쇳덩이 200킬로그램을 벗어던진 그 선택의 연장선에 지금의 우리가 서 있는 것입니다. 편리함을 얻는 대가로 신뢰를 관리해야 하는 숙제를 함께 물려받았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