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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만 있었던 19억 유로

2020년 6월 18일, 독일 증시에서 한 종목의 주가가 하루 만에 60퍼센트 가까이 무너졌습니다. 회사 이름은 와이어카드, 독일을 대표하는 주가지수인 닥스에 이름을 올린 결제 기업이었습니다. 원인은 실적 악화도, 대형 소송도 아니었습니다. 감사를 맡은 회계법인이 연차 보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부의 이유가 더 놀라웠습니다. 회사 장부에 적혀 있던 19억 유로가 실제로 은행 계좌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흘 뒤 회사는 스스로 입장을 냈습니다. 그 돈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6월 25일 와이어카드는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닥스에 편입된 기업이 파산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정말 곱씹어야 할 대목은 무너진 속도가 아닙니다. 이 회사를 둘러싼 의혹은 하루아침에 튀어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년 동안 한 신문이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했고, 그때마다 먼저 조사를 받은 쪽은 회사가 아니라 그 기사를 쓴 기자들이었습니다.

독일이 기다리던 핀테크

와이어카드는 1999년 뮌헨 근교 아쉬하임에서 출발한 결제 처리 회사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이나 가맹점이 카드 결제를 받을 수 있도록 뒤에서 돈의 흐름을 중개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배관 같은 일이지만, 전자상거래가 커질수록 함께 커지는 구조였습니다. 성장세는 가팔랐고 실적은 해마다 좋아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2018년 9월 24일, 이 회사는 독일 대표 지수인 닥스에 편입됐습니다. 닥스는 우리 증시로 치면 대표 우량주를 모아 놓은 지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와이어카드가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상대는 뿌리가 187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코메르츠방크였습니다. 젊은 기술기업이 오래된 은행을 대체하는 장면은 독일에서 상징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시가총액은 한때 240억 유로를 넘어섰습니다. 2019년 4월에는 소프트뱅크가 9억 유로 규모의 전환사채에 투자한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습니다. 전환사채란 나중에 정해진 조건으로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채권을 말합니다. 미국과 중국에만 있던 대형 기술기업이 독일에서도 나왔다는 자부심이 시장에 퍼졌습니다.

그 자부심은 나중에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회사에 대한 의심이 제기될 때마다, 그 의심은 단순히 한 기업에 대한 문제 제기가 아니라 독일 산업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처럼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믿을 것인가를 정할 때 국적과 감정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판단은 흐려집니다.

6년을 매달린 기자

그 분위기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의 댄 맥크럼 기자였습니다. 그는 2015년부터 와이어카드의 회계와 인수합병을 파고드는 연재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출발점은 단순한 의문이었습니다. 이 회사의 이익이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지가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2016년에는 자타라 리서치라는 이름의 보고서가 나와 회사를 둘러싼 의혹을 제기했고, 주가는 며칠 만에 20퍼센트 넘게 빠졌습니다. 회사는 이를 주가를 떨어뜨리려는 공격으로 규정했습니다. 2019년 1월 30일에는 파이낸셜타임스가 싱가포르 지사에서 계약서가 위조됐다는 의혹을 보도했습니다. 회사는 이번에도 전면 부인했습니다.

핵심 쟁점은 아시아의 제휴 회사들을 통한 매출이었습니다. 와이어카드는 일부 지역에서 직접 영업을 하는 대신 현지 파트너사를 통해 결제를 처리한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문제는 그 구조에서 나온다는 이익과, 그 이익이 쌓여 있다는 현금이었습니다. 두 가지 모두 회사 바깥에서 확인하기가 유독 어려웠습니다.

보도가 나올 때마다 주가는 출렁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복되곤 했습니다. 회사가 의혹을 강하게 부인하고 법적 대응을 예고하면 시장은 다시 회사 편에 섰습니다. 의혹이 반복되는데도 값이 계속 오르는 상황은 투자자에게 묘한 신호를 줍니다. 의심하는 쪽이 계속 틀렸다는 기록이 쌓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감독당국이 겨눈 방향

보도가 이어지자 독일 금융감독청인 바핀이 움직였습니다. 다만 그 방향이 뜻밖이었습니다. 2019년 2월 18일, 바핀은 와이어카드 주식에 대해 두 달간 공매도를 금지했습니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서 먼저 판 뒤 값이 내리면 되사서 갚아 차익을 남기는 거래를 말합니다. 독일 감독당국이 개별 종목 한 곳을 콕 집어 이런 조치를 내린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핀은 시세조종 의혹을 들어 파이낸셜타임스 기자들을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의혹을 제기한 언론과, 그 의혹이 맞다는 데 돈을 건 투자자들이 먼저 수사 대상이 된 것입니다. 독일 검찰은 2020년 9월 기자들에 대한 수사를 종결했습니다. 회사가 파산한 뒤의 일이었습니다.

공매도 세력은 시장에서 인기가 없습니다. 값이 내려야 돈을 버는 쪽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실제로 근거가 약한 소문을 퍼뜨리는 경우도 있어 감독당국이 시장 질서를 지키려는 것 자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만 이 사건에서는 순서가 문제였습니다. 장부를 먼저 확인하는 대신 질문한 쪽을 먼저 조사하면, 정작 확인해야 할 숫자는 그만큼 뒤로 밀립니다.

그렇게 벌어진 시간은 짧지 않았습니다. 첫 연재 기사가 나온 2015년부터 회사가 무너진 2020년까지 5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그 사이 주가는 최고치를 다시 썼으며 새로운 투자자들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을 때 손실을 떠안은 쪽은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장부에 있던 돈, 통장에 없던 돈

의혹을 잠재우기 위해 회사는 2019년 10월 21일 회계법인 KPMG에 특별감사를 맡겼습니다.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결론은 2020년 4월 28일에 나왔습니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제기된 문제들을 확인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의혹을 씻어내려던 조사가 오히려 물음표를 키운 셈입니다.

그리고 6월 18일, 정기 감사를 맡고 있던 회계법인 EY가 필리핀 은행의 신탁 계좌에 있다던 19억 유로를 확인할 수 없다며 2019년 연차 보고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주가는 그날 60퍼센트 가까이 무너졌습니다. 6월 19일 최고경영자 마르쿠스 브라운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22일 회사는 그 돈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공식적으로 밝혔습니다.

6월 23일 브라운이 체포됐고, 25일 회사는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채권자들에게 남은 채무는 32억 유로 규모로 집계됐습니다. 닥스에 편입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독일 대표 지수의 구성 종목이 이렇게 사라진 전례는 없었습니다.

감사법인의 역할은 이후 오래도록 논란이 됐습니다. EY는 여러 해에 걸쳐 이 회사를 감사해 왔고, 그 기간 내내 장부에 적힌 현금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EY는 독일 안팎에서 부실 감사 논란과 조사, 투자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에 직면했습니다. 감사보고서에 적정 의견이 찍혀 있다는 사실이 곧 안전 보증은 아니라는 점을, 이 사건은 아프게 보여 줬습니다.

도피한 임원과 끝나지 않은 재판

회사가 무너지던 주에 사라진 사람이 있습니다. 최고운영책임자였던 얀 마르살렉입니다. 그는 해임된 직후 종적을 감췄고, 이후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국제 수배 상태이며, 여러 탐사보도가 그와 정보기관의 연결 의혹을 제기해 왔습니다. 다만 이런 의혹들은 아직 법정에서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형사재판은 2022년 12월 뮌헨에서 시작됐습니다. 피고인석에는 브라운 전 최고경영자와 전 회계책임자, 그리고 두바이 자회사를 이끌던 올리버 벨렌하우스가 앉았습니다. 벨렌하우스는 법정에서 자신의 관여를 인정하면서 브라운을 지목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피고인들의 진술이 정면으로 엇갈린 것입니다.

브라운은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 사건의 주모자가 아니라 오히려 속은 피해자라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는 법원이 판단할 문제이고, 그 판단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재판은 2026년 현재 4년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공판은 260회를 넘겼고 증인은 220명을 넘었지만 판결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브라운은 5년 넘게 구금 상태에 있고, 변호인 측의 석방 요청은 지금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19억 유로가 장부에만 있었다는 사실은 회사 스스로 인정했지만, 누가 어디까지 형사 책임을 지는지는 여전히 다투어지는 중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대표 지수에 편입됐다는 사실은 품질 보증서가 아닙니다. 지수는 시가총액과 거래량 같은 기준에 따라 기계적으로 구성원을 고르는 장치일 뿐, 그 회사의 장부가 진실한지를 심사하지 않습니다. 지수에 들어왔다는 소식, 유명 투자자가 들어왔다는 소식만으로 안심하는 습관은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사보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정 의견은 감사인이 주어진 자료 안에서 중대한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지, 사기가 없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와이어카드의 현금은 여러 해 동안 장부 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고, 그 숫자를 누구도 은행에 직접 대조해 보지 않았습니다.

불편한 질문을 하는 쪽을 미워하기 전에, 그 질문의 내용을 먼저 읽어 보는 습관도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회사가 의혹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는 일입니다. 자료와 숫자로 답하는지, 아니면 질문한 사람의 의도를 공격하는지를 보면 많은 것이 보입니다. 이 사건에서 회사는 오랫동안 후자를 택했고, 한동안은 감독당국도 같은 방향을 바라봤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회사는 사라졌고 돈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책임을 가리는 법정의 시계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습니다. 결론이 나기 전의 이야기를 결론처럼 읽지 않는 것, 그것도 시장을 대하는 태도의 일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