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추보다 짧았던 총리의 45일
2026-10-13 · 20분 읽기
2022년 10월 20일 오후, 영국 다우닝가 10번지 앞. 리즈 트러스 총리가 사임을 발표하던 그 순간, 영국의 한 타블로이드 신문 유튜브 채널에서는 1만 2천 명이 상추 한 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데일리스타가 테스코 매장에서 60펜스에 사 온 아이스버그 상추였습니다. 방송 제목은 “리즈 트러스가 상추보다 오래 버틸 수 있을까”였습니다. 사임 발표 직후 시청자는 2만 1천 명으로 늘었고, 그날 저녁 누적 시청자는 170만 명을 넘었습니다. 상추가 이겼습니다.
웃기려고 만든 방송이었지만 그 방송이 가리키던 사건은 전혀 웃기지 않았습니다. 그 45일 사이 영국 3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사흘 만에 1.3퍼센트포인트가 뛰었습니다. 영란은행이 과거 기록을 뒤져보니 그 만기 구간에서 그만큼 움직인 전례는 없었고, 기록상 최대 변동폭의 세 배였습니다. 파운드는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를 찍었고, 하루 만에 주택담보대출 상품 935개가 시장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영국 직장인들의 퇴직연금을 굴리는 기관들이 담보를 더 내라는 요구에 떠밀려 국채를 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방아쇠였습니다. 전쟁도 아니고, 은행 파산도 아니고, 분식회계도 아니었습니다. 금요일 아침 재무장관이 의회에서 읽어 내린 감세안 한 건이었습니다. 문서에는 “성장 계획”이라는 점잖은 제목이 붙어 있었고 분량도 길지 않았습니다. 그 문서가 닷새 뒤 중앙은행의 긴급 국채 매입을 불러왔습니다.
상추보다 짧았던 임기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리즈 트러스는 2022년 9월 6일 영국 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총선으로 뽑힌 것이 아니라, 보리스 존슨이 물러난 뒤 보수당 당원 투표에서 리시 수낙을 꺾고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영국 물가상승률은 10퍼센트 선을 오르내리고 있었고, 가스 요금이 치솟아 겨울을 어떻게 넘기느냐가 최대 현안이었습니다. 트러스는 경선 기간 내내 감세로 성장을 되살리겠다는 단일 메시지를 밀었습니다.
취임 이틀 뒤인 9월 8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서거했습니다. 영국 정치는 국가 애도 기간에 들어가 정책 일정을 멈췄고, 9월 19일 국장이 끝난 뒤에야 다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새 정부의 첫 경제 발표는 취임 2주가 지난 9월 23일 금요일로 밀렸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2주 동안 세계 금리는 계속 오르고 있었습니다. 영란은행도 9월 22일 금리를 올린 직후였습니다.
재무장관은 콰시 콰텡이었습니다. 그가 취임하고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재무부 최고위 공무원인 톰 숄라 사무차관을 사실상 내보낸 것이었습니다. 숄라는 금융위기와 브렉시트, 코로나 대응을 거친 재무부의 제도적 기억 그 자체로 통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시장에서는 다른 뜻으로도 읽혔습니다. 새 정부가 어떤 숫자를 내놓든 그 숫자를 안에서 말려줄 사람이 줄었다는 뜻이었습니다.
트러스와 콰텡의 세계관은 분명했습니다. 영국의 저성장은 세금과 규제 때문이고, 세금을 깎으면 성장률이 오르며, 성장률이 오르면 세수도 따라 늘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연 2.5퍼센트 성장을 목표로 내걸었습니다. 문제는 이 설계가 맞든 틀리든 세수가 먼저 줄고 성장이 나중에 오는 구조였다는 점입니다. 그 시간차를 메우는 것은 국채, 즉 빚이었습니다.
9월 23일, 재원 설명이 빠진 감세안
9월 23일 금요일 오전, 콰텡은 하원에서 성장 계획 2022를 발표했습니다. 영국에서 정식 예산안은 정해진 절차를 밟아 나오는데 이 발표는 그 형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처음부터 이것을 미니예산이라 불렀습니다. 이름은 미니였지만 내용은 전혀 작지 않았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1972년 이후 가장 큰 감세라고 적었습니다.
담긴 항목을 늘어놓으면 이렇습니다. 소득세 기본세율을 20퍼센트에서 19퍼센트로 내리는 시점을 2023년 4월로 앞당기고, 고소득자에게 적용되던 45퍼센트 최고세율은 아예 없애기로 했습니다. 그해 4월 올린 국민보험료 1.25퍼센트포인트 인상은 11월 6일부터 되돌리고, 2023년 4월 도입 예정이던 건강·사회복지부담금은 백지화했습니다. 법인세를 19퍼센트에서 25퍼센트로 올리려던 계획도 취소했습니다. 주택 거래 인지세 면세 기준은 25만 파운드, 생애최초 구입자는 42만 5천 파운드로 올렸습니다.
규모는 이렇게 집계됐습니다. 이 감세들이 다 시행되면 2026/27년도 기준으로 연 450억 파운드의 세수가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발표 전체를 5년으로 누적하면 1,610억 파운드 규모였고, 여기에 가계 에너지 요금을 눌러주는 지원책이 600억 파운드로 따로 얹혀 있었습니다. 영국 재정연구소는 이대로 가면 2026년 정부 차입이 1,000억 파운드까지 늘어날 것으로 봤습니다. 직전 전망치는 300억 파운드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발표문에는 그 돈을 어디서 가져올지가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지출을 줄이겠다는 계획도, 다른 세목으로 보전하겠다는 계획도 없었습니다. 남은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전액 차입, 즉 국채를 더 찍어 파는 것이었습니다. 하필 영란은행은 코로나 때 사들인 국채를 10월 초부터 다시 시장에 팔기 시작할 예정이었습니다. 국채 공급이 양쪽에서 동시에 늘어나는 그림이 하루 만에 완성된 것입니다.
시장이 특히 화를 낸 세 가지
첫째는 검증을 건너뛴 것이었습니다. 영국에는 예산재정청(OBR)이라는 독립 재정기구가 있습니다. 정부가 예산을 내놓을 때 그 숫자가 앞뒤가 맞는지 바깥에서 따져 공개하는 기관입니다. 미니예산에는 이 기관의 전망이 붙지 않았습니다. 정식 예산안이 아니라는 형식 논리였지만 OBR 쪽에서는 전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뜻을 전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둘째는 규모와 설명의 불균형이었습니다. 감세 자체를 반대한 투자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얼마를 깎는다는 숫자만 있고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운다는 문장이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채권 투자자가 사는 것은 결국 정부가 약속을 지킬 능력입니다. 능력을 보여주는 자료 없이 부담만 늘어나면 요구 금리가 올라갑니다. 국채 금리가 올라간다는 말은 곧 국채 가격이 떨어진다는 말과 같습니다.
셋째는 분배였습니다. 9월 27일 국제통화기금이 이례적인 성명을 냈습니다. IMF는 조치를 재평가하라고 권고하면서 영국 조치의 성격은 불평등을 키울 가능성이 높다고 적었습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9월 28일 이 계획을 신용에 부정적이라고 평가했고, 10월 21일에는 영국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내렸습니다.
다만 짚어둘 점이 있습니다. 시장은 영국이 돈을 못 갚을까 봐 겁을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국은 자기 통화를 찍는 나라이고, 길트(영국 국채)는 여전히 최상위 신용 자산으로 분류됐습니다. 흔들린 것은 신용이 아니라 신뢰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흔들림이 가격 변동으로 나타나는 순간 전혀 다른 종류의 폭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 폭탄은 정부 안이 아니라 연기금 안에 있었습니다.
금요일, 월요일, 그리고 화요일
9월 23일 금요일 당일부터 반응이 나왔습니다. 파운드는 달러 대비 3퍼센트 넘게 빠져 1.09달러 선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채권시장에서는 5년 만기 영국 국채 금리가 기록상 가장 큰 하루 상승폭을 기록했습니다. 보통 감세는 성장 기대로 주식에 호재로 읽히는데, 이날은 주식도 채권도 통화도 같이 밀렸습니다.
숫자를 만기별로 보면 더 선명합니다. 2년 만기 국채 금리는 9월 22일 종가 3.5퍼센트에서 9월 27일 종가 4.7퍼센트로 올랐습니다. 30년 만기는 9월 22일부터 27일 사이에 1.2퍼센트포인트가 뛰어 27일 종가 5퍼센트를 찍었습니다. 영란은행 자체 집계로는 9월 28일까지 사흘 동안 30년물 금리가 130베이시스포인트, 즉 1.3퍼센트포인트 올랐고, 기록에 남은 어떤 유사 사례보다 세 배 큰 움직임이었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9월 26일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는 새벽 시간에 파운드는 1.0327달러까지 밀렸습니다. 달러 대비 사상 최저치였습니다. 장중 낙폭은 한때 4.9퍼센트에 달했습니다. 런던 시장이 열린 뒤 1.0689달러 선으로 일부 회복했지만, 영국이 IMF에 손을 벌리는 상황까지 입에 올리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9월 27일 화요일에는 불이 금융시장 밖으로 번졌습니다. 영국 주택담보대출 상품 935개가 하루에 시장에서 철수했습니다. 집계 기관 머니팩츠 기준 단일 최대 기록이었고, 이전 기록은 2020년 첫 코로나 봉쇄 발표일의 462개였습니다. 대출 금리를 정하는 기준인 2년 만기 스왑금리가 6퍼센트 근처까지 오르자 은행들은 상품 금리를 계산할 수가 없어 아예 판매를 멈췄습니다.
LDI, 연기금이 금리를 묶어두려 한 방법
연기금은 직장인들이 낸 돈을 모아 굴리면서 은퇴 후 연금을 지급하는 기관입니다. 이번 사건의 중심에 선 것은 그중에서도 확정급여형 제도였습니다. 확정급여형이란 은퇴하면 매달 얼마를 주겠다는 금액을 회사가 미리 약속하는 방식입니다. 운용 성과가 나쁘면 모자란 돈을 회사가 메워야 하므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지가 매일의 숙제가 됩니다. 한국 독자에게는 국민연금처럼 정해진 급여를 약속하는 제도를 떠올리면 성격을 짚기 쉽지만, 운용 주체와 규제 틀이 달라 같은 제도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확정급여형 연기금에는 특이한 셈법이 있습니다. 30년 뒤에 줄 돈을 지금 가치로 환산해 부채로 잡는데, 이때 쓰는 할인율이 사실상 장기 국채 금리입니다. 금리가 내려가면 30년 뒤 지급액의 현재가치가 커지고 따라서 장부상 부채가 불어납니다. 금리가 1퍼센트포인트만 내려가도 부채가 수십 퍼센트 늘어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주가 하락이 아니라 금리 하락이었습니다.
방어법은 간단합니다. 장기 국채를 잔뜩 사서 들고 있으면 됩니다. 금리가 내려가 부채가 늘어도 들고 있던 장기 국채 가격이 올라 상쇄됩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부채 전체를 국채로 덮으려면 자산을 거의 다 국채에 넣어야 하는데, 그러면 주식 같은 수익자산에 넣을 돈이 없어집니다. 이 딜레마의 해법으로 등장한 것이 LDI, 부채연계투자입니다.
LDI는 파생상품을 써서 적은 돈으로 큰 금리 노출을 만드는 방식입니다. 파생상품은 어떤 자산의 가격이나 금리 움직임에만 연동되는 계약으로, 자산을 실제로 다 사지 않고도 그 가격 변화의 효과를 얻게 해 줍니다. 금리스왑은 두 당사자가 변동금리와 고정금리를 서로 교환하기로 하는 계약으로, 금리가 내려갈 때 이익이 나도록 방향을 맞춰 두면 부채 증가를 상쇄해 줍니다. 또 하나는 레포, 즉 환매조건부채권 거래였습니다. 가진 국채를 담보로 맡겨 현금을 빌리고 그 현금으로 국채를 또 사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적은 자기 돈으로 큰 자산을 움직이는 것을 레버리지라고 부릅니다. 영란은행 연구에 따르면 영국에서 LDI 관련 상품에 들어간 돈은 1조 파운드를 넘었습니다. 연금감독청 집계로는 2021년 말 기준 민간 확정급여형 제도의 약 60퍼센트, 3천 개 가까운 기금이 LDI를 썼고, LDI 펀드를 통해 금리 위험을 덮은 부채 규모는 약 1.4조 파운드였습니다. 2018년 말의 약 1조 파운드에서 3년 만에 불어난 수치입니다.
영국이 특히 심했던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국 금융감독청의 니킬 라티 청장은 영국 연기금이 금리 위험의 약 85퍼센트를 헤지하고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비교 대상으로 든 네덜란드는 약 50퍼센트였습니다. 구조도 문제였습니다. 큰 기금은 자기 이름으로 맞춤 계약을 맺었지만, 작은 기금들은 여러 기금이 돈을 모아 함께 운용하는 합동운용 펀드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영란은행 추산으로 이 합동운용 LDI 펀드는 약 2천억 파운드, 전체 시장의 15퍼센트 정도였고, 가장 먼저 주저앉은 쪽이 바로 여기였습니다.
금리가 오르면 담보를 더 내야 하고, 담보를 만들려면 또 팔아야 합니다
파생상품 계약과 레포 거래에는 공통된 규칙이 있습니다. 손실이 쌓이면 상대방에게 돈이나 안전자산을 더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맡기는 자산을 담보라고 하고, 더 맡기라는 요구를 마진콜이라고 부릅니다. 계약 상대가 떼일 위험을 줄이려고 만든 안전장치입니다. 평시에는 번거로운 사무 절차일 뿐입니다. 문제는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손실을 볼 때 생깁니다.
LDI는 금리가 내려갈 때 이익이 나도록 방향이 잡혀 있었습니다. 2022년은 그 반대였습니다. 연초부터 금리가 오르면서 평가손실이 쌓였지만 속도가 견딜 만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9월 23일 이후는 속도가 달랐습니다. 영란은행 연구는 9월 23일부터 27일까지 닷새간 스왑 포지션의 평가손실만 약 80억 파운드라고 집계했습니다. 그만큼 담보를 더 내놓으라는 요구가 즉시 발생했습니다.
전체 규모는 더 큽니다. IMF 보고서는 영국 연기금과 LDI 펀드가 이 기간 맞닥뜨린 마진·담보 요구를 대략 700억 파운드로 추산했습니다. 이 돈은 투자 손실이 아니라 당장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현금성 요구입니다. 연기금은 자산이 많았지만, 자산이 많다는 것과 내일 아침까지 현금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보유 자산의 상당 부분은 장기 채권과 비상장 자산이었습니다.
레버리지를 쓴 펀드에서는 더 험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영란은행 설명에 따르면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서 레버리지 LDI 펀드의 순자산가치가 줄었고, 같은 자산을 더 적은 자기 돈으로 떠받치게 되니 레버리지 비율이 오히려 올라갔습니다. 일부 펀드는 순자산이 0에 가까워졌습니다. 그 선을 넘으면 돈을 빌려준 쪽이 맡아둔 담보를 압류해 처분할 수 있습니다.
정석대로라면 뒤에 있는 연기금이 돈을 더 넣어 펀드를 자본보강하면 됩니다.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수천 개 기금이 각자 이사회를 열고 자산을 팔고 송금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특히 작은 기금들이 모인 합동운용 펀드에서는 투자자 수가 많아 의사결정이 더 느렸습니다. 며칠짜리 위기에 몇 주짜리 절차로 대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남은 선택지는 팔아서 현금을 만드는 것이었고, 가진 자산 중 가장 빨리 팔릴 만한 것이 바로 길트였습니다. 여기서 소용돌이가 완성됩니다. 국채 가격이 떨어져 담보 요구가 생기고, 담보를 만들려고 국채를 팔고, 그 매도가 국채 가격을 더 떨어뜨리고, 그래서 담보 요구가 또 생깁니다. 영란은행은 이 구조를 역방향 피드백 루프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을 구하려는 행동이 자신을 더 위험하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실제 매도 규모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란은행 연구는 9월 23일부터 10월 14일까지 LDI 펀드와 연기금의 길트 순매도가 360억 파운드를 넘었다고 집계했습니다. 더 심하게 팔린 쪽은 물가연동국채였습니다. 원금과 이자가 물가에 연동되는 채권으로, 물가에 맞춰 연금을 올려주는 기금들이 선호해 레포 담보로도 많이 쓰였습니다. 9월 22일 기준 이 부문 레포 차입 약 1,350억 파운드 가운데 약 950억 파운드가 물가연동채를 담보로 한 것이었고, 10월 28일까지 누적 매도는 물가연동채 약 180억 파운드, 일반 국채 약 60억 파운드였습니다.
9월 28일 오전, 영란은행이 끼어들었습니다
9월 28일 오전 영란은행이 성명을 냈습니다. 문장은 짧고 건조했습니다. 가격 재조정이 특히 장기 영국 국채 시장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적고, 이어 이 시장의 기능 불안이 계속되거나 악화되면 영국 금융안정에 중대한 위험이 있을 것이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장기 국채를 임시로 사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규모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규모만큼이라고만 적었고, 손실이 나면 재무부가 전액 보전한다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조건은 명확히 선을 그어 두었습니다. 매입은 발표 당일부터 10월 14일까지, 영업일 기준 13일간만 진행하고 엄격히 기한이 정해져 있다고 못 박았습니다. 하루 최대 50억 파운드씩 입찰받기로 했으니 상한은 650억 파운드였습니다. 연간 800억 파운드 보유 축소 목표는 그대로 두고 국채 매각 시작일만 10월 31일로 미뤘습니다. 물가를 잡기 위해 국채를 팔아야 하는 기관이 금융안정을 위해 국채를 사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
발표 직후 30년물 금리는 큰 폭으로 떨어지고 투매가 멈췄습니다. 하지만 기한이 10월 14일로 못 박혀 있었기 때문에 10월로 들어서자 다시 올라갔습니다. 10월 12일에는 20년물 금리가 5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영란은행은 마지막 주에 두 번 더 손을 썼습니다. 10월 10일 하루 매입 한도를 50억에서 100억 파운드로 올리고 임시 확대담보 레포 기구를 열었으며, 10월 11일에는 매입 대상에 물가연동국채를 추가했습니다.
같은 10월 11일, 워싱턴에 있던 앤드루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가 국제금융협회 행사에서 말했습니다. 기한 연장을 기대하던 연기금들을 향해 사흘 남았으니 끝내야 한다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던진 것입니다. 중앙은행이 특정 업종에 공개 시한을 통보한 셈이어서 파운드가 또 밀렸습니다. 베일리의 계산은 분명했습니다. 기한을 늘려주면 아무도 포지션을 정리하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중앙은행이 위험을 영구히 떠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를 숫자로 보면 흥미롭습니다. 영란은행이 실제로 사들인 국채는 총 193억 파운드, 일반 국채 121억에 물가연동국채 72억 파운드였습니다. 상한으로 걸어둔 650억 파운드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습니다. 되팔기도 빨랐습니다. 11월 10일 처리 방식을 공개하고 11월 29일부터 매각을 시작해 2023년 1월 12일까지 12거래일에 걸쳐 전량 정리했고, 매입가보다 높은 값에 팔려 손실 없이 끝났습니다.
경질, 철회, 사임 — 3주의 정치
시장이 멈춘 뒤에도 정치는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10월 3일 버밍엄에서 열린 보수당 전당대회 첫날 아침, 콰텡은 최고세율 45퍼센트 폐지안을 철회했습니다. 발표 열흘 만이었습니다. 전체 감세 규모에서 이 항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지만 상징성은 가장 컸습니다. 콰텡은 우리는 알아들었고 귀를 기울였다고 말했습니다. 하루 전 트러스가 방송에서 이 안을 고수하겠다고 밝힌 직후였습니다.
10월 14일 금요일, 콰텡은 워싱턴에서 열린 IMF 연차총회 일정을 중단하고 급히 귀국했습니다. 공항에서 다우닝가로 직행한 그는 그 자리에서 해임됐습니다. 재무장관 취임 38일째였습니다. 후임은 보건장관과 외무장관을 거친 제러미 헌트였습니다. 같은 날 법인세 인상 취소도 철회됐습니다. 법인세는 원래 계획대로 25퍼센트로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헌트는 10월 17일 긴급 성명을 냈습니다. 남아 있던 감세안 대부분이 이 자리에서 사라졌습니다. 소득세 기본세율 인하, 배당소득세 인하, 프리랜서 과세 규정 환원, 외국인 관광객 부가세 환급, 주류세 동결이 모두 취소됐습니다. 재무부는 이 철회로 연 약 320억 파운드의 세수가 회복된다고 밝혔습니다. 2년간 유지하겠다던 가계 에너지 요금 보장도 2023년 4월까지로 줄였습니다.
살아남은 항목도 있습니다. 국민보험료 인상 철회와 건강·사회복지부담금 백지화는 유지됐고, 인지세 인하와 연간투자공제 100만 파운드 영구화도 남았습니다. 하원 도서관 집계로 발표 당시 450억 파운드였던 감세 규모는 10월 17일 성명 직전 약 250억 파운드로 줄어 있었고 그날 다시 크게 깎였습니다. 정부의 경제 계획표가 3주 만에 거의 백지로 돌아간 것입니다.
10월 20일, 트러스는 다우닝가 앞에서 사임을 발표했습니다. 취임 45일째였습니다. 집권당 대표로서의 정치적 생명이 끝난 시점을 어떻게 세느냐에 따라 49일로 적는 기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영국 역사상 가장 짧은 총리 재임이었습니다. 10월 25일 리시 수낙이 총리에 취임했고, 그 뒤 30년물 길트 금리는 3.68퍼센트까지 내려왔습니다. 9월 27일 종가 5퍼센트에서 한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60펜스짜리 상추의 생중계
상추 이야기의 출발은 타블로이드가 아니라 경제지였습니다. 2022년 10월 11일 이코노미스트는 리즈 트러스가 영국을 채권 투자자에게 더 위험한 투자처로 만들었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습니다. 이 칼럼은 여왕 서거와 국장 기간을 빼면 트러스가 실제로 권력을 행사한 기간이 열흘 남짓이라고 계산하면서, 그 길이를 양상추의 유통기한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면서 아이스버그 레이디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그 칼럼을 데일리스타의 부편집장 데니스 만이 읽었습니다. 그는 이 비유를 편집장 존 클라크에게 전했고, 클라크는 여기서 가능성을 봤습니다. 10월 14일 데일리스타는 유튜브에 생중계를 띄웠습니다. 제목은 생중계, 리즈 트러스가 상추보다 오래 버틸 수 있을까였습니다. 방송 세트는 신문사 스튜디오가 아니라 영상 편집자 에드워드 키블의 집이었습니다.
상추는 런던 월섬스토의 테스코 매장에서 60펜스에 산 아이스버그 상추였고, 예상 유통기한은 열흘 정도였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방송은 첫 다섯 시간 만에 좋아요 5만 개를 넘겼고, 다음 날에는 시청자가 35만 명을 넘었습니다. 영국 밖 외신들도 이 방송을 보도했습니다. 중앙은행 긴급 개입과 국채 금리라는 어려운 주제를 설명하는 데, 누구나 보면 아는 상추 한 통이 어떤 그래프보다 효율적이었던 것입니다.
10월 20일 사임 발표 시점에 이 방송을 보던 사람은 1만 2천 명이었고, 발표 직후 2만 1천 명으로 늘었습니다. 그날 저녁 누적 시청자는 170만 명을 넘겼습니다. 데일리스타는 상추의 승리를 선언했습니다. 10월 21일자 1면에는 Lettuce rejoice라는 제목이 실렸습니다. 영어 lettuce의 발음이 let us와 비슷한 것을 이용한 말장난으로, 상추에게 기뻐하라는 말과 우리 함께 기뻐하자는 말을 동시에 뜻합니다.
후일담도 남아 있습니다. 엿새 동안 조명 아래 놓였던 상추는 변색은 됐지만 완전히 썩지는 않았고, 신문사는 이 상추를 먹을 계획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2024년 10월에는 상추를 구입한 월섬스토 테스코 앞에 기념 명판 모양의 장식이 걸렸습니다. 2025년 10월에는 영국영화협회가 이 영상을 보존 자료로 수집했습니다.
그 뒤 영국이 바꾼 것들
가장 먼저 바뀐 것은 연기금 규제였습니다. 영국 연금감독청은 2023년 4월 24일 레버리지 LDI 사용에 관한 지침을 내놓았습니다. 핵심은 담보 완충을 두 겹으로 쌓으라는 것입니다. 평시 변동성에 대응하는 운영 완충과 심각한 스트레스에 대응하는 시장스트레스 완충을 각각 두고 합산하라는 요구였습니다. 시장스트레스 완충의 최소선은 250베이시스포인트로 제시됐고, 5영업일 안에 다시 채울 수 있다는 전제가 붙었습니다.
지침이 든 예시는 운영 완충 100베이시스포인트에 시장스트레스 완충 250베이시스포인트를 더한 350베이시스포인트였습니다. 쉽게 말해 장기 금리가 3.5퍼센트포인트 올라도 마진콜에 떠밀려 자산을 팔지 않고 버틸 여유 자금을 상시로 들고 있으라는 요구입니다. IMF 보고서에 따르면 LDI 펀드들은 실제로 300에서 400베이시스포인트 수준의 완충을 쌓았습니다. 대가는 수익률입니다. 완충으로 들고 있는 자산은 수익을 거의 내지 않습니다.
중앙은행 쪽에서도 장치가 생겼습니다. 영란은행은 2024년 7월 잠정 공고를 내고 2025년 1월 정식 공고로 비은행 금융기관 상시대기 레포 기구를 마련했습니다. 보험사, 확정급여형 연기금, 그리고 투자자의 금리·물가 부채에 맞춰 자산을 운용하는 LDI 펀드가 대상입니다. 상시 가동되는 창구가 아니라 심각한 길트시장 기능 장애가 금융안정을 위협할 때 영란은행 판단으로 여는 비상 창구입니다. 2022년처럼 국채를 사서 가격을 떠받치는 대신, 담보를 받고 돈을 빌려주어 팔지 않고도 현금을 만들 길을 미리 열어 둔 것입니다.
감독과 데이터 쪽도 손봤습니다. 영란은행은 은행과 비은행을 한꺼번에 놓고 스트레스를 걸어보는 시스템 전반 탐색 시나리오를 돌렸고, 2025년에는 길트 레포 시장의 복원력을 높이는 방안을 담은 논의 자료를 내놓았습니다. 하원 노동연금위원회는 2023년 보고서에서 사후 점검을 했습니다. 영란은행이 2018년에 수행한 분석은 길트 금리가 100베이시스포인트 오르는 상황까지만 검증했고, 위원회는 2018년에 확인된 위험에 대해 더 많은 조치가 있어야 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실제로 가장 먼저 무너진 쪽은 합동운용 펀드에 들어가 있던 소형 기금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연금 가입자들은 돈을 잃었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아직 깔끔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개인 단위 자료를 확보하지 못해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히면서 담당 부처가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을 매우 유감이라고 적었습니다. 전체 지표는 오히려 좋아졌습니다. 연금보호기금 추산으로 2022년 3월부터 2023년 3월까지 적립비율은 20퍼센트포인트 이상 개선됐고, 2023년 4월에는 87퍼센트의 기금이 잉여 상태였습니다. 다만 2022년 중 기금 총자산 자체는 약 4,000억 파운드가 줄었고, 키팅과 클래처가 350개 기금을 분석한 결과로는 3분의 1 가까이가 적립비율이 오히려 나빠졌습니다.
남은 논쟁 — 방아쇠냐, 화약이냐
지금도 정리되지 않은 질문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미니예산입니까, 아니면 그 전부터 쌓여 있던 LDI 레버리지입니까. 한쪽 주장은 명확합니다. 영란은행 워킹페이퍼 1019호는 9월 23일 발표가 금리 급등의 출발점이었다고 적었습니다. IMF 보고서도 표준적인 스트레스테스트 범위를 넘는 금리 변동을 만들어낸 재정 이벤트가 방아쇠였다고 봤습니다.
다른 쪽 주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영란은행 부총재 사라 브리든은 의회에서 이 사건의 근본 원인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레버리지라고 표현했습니다. 베일리 총재는 급격한 금리 변동, 레버리지, 그리고 합동운용 펀드를 강제 매도자로 만든 구조적 문제가 결합된 결과로 설명했습니다. 경제학자 데이비드 블레이크는 더 나아가 시스템 위기의 책임은 레버리지 LDI 상품 자체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미니예산은 불을 붙인 성냥이었을 뿐이고, 창고에 쌓여 있던 화약이 문제였습니다.
트러스 본인의 설명은 또 다릅니다. 그는 이후 회고와 인터뷰에서 영란은행과 기성 체제 쪽에 책임을 돌리며 딥 스테이트 같은 표현을 썼습니다. 이 주장은 영국 안에서 널리 반박됐습니다. 가장 많이 쓰인 반론은 단순합니다. 2022년에 금리가 오른 나라는 영국만이 아니었는데 영국만 유독 중앙은행 긴급 개입까지 갔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그 반론을 거듭니다. 위기가 가장 심했던 시점에 영국 30년물 금리는 같은 만기 미국 국채보다 1.2퍼센트포인트, 독일 국채보다 2.9퍼센트포인트 높았습니다. 하지만 반대 방향으로도 같은 논리가 성립합니다. 레버리지와 담보 구조가 없었다면 똑같은 재정 발표가 나와도 금리가 오르는 데 그쳤을 것이고 중앙은행이 끼어들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금리 상승 자체는 사고가 아닙니다. 사고는 금리 상승이 강제 매도로 번역되는 배관에서 났습니다.
그래서 가장 설득력 있는 정리는 둘을 나누지 않는 쪽입니다. 영란은행 워킹페이퍼는 위기 전 레포 노출, 특히 물가연동국채를 담보로 한 레포 노출이 이후의 길트 매도 규모를 가장 잘 예측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결과는 방아쇠와 폭발력이 각각 다른 곳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재정 발표가 충격을 만들었고 레버리지가 그 충격을 몇 배로 증폭해 시스템 사건으로 바꿨습니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질문이 애초에 잘못 세워진 질문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첫째, 헤지는 위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다른 위험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영국 연기금들은 금리 하락 위험을 정확히 겨냥해 막았고 기술적으로는 성공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유동성 위험이라는 새 위험이 생겼습니다. 장부상으로 이기면서 현금이 없어 쫓겨날 수 있다는 위험이었습니다. 파생상품으로 무엇을 막을 때는 그 막음의 대가로 어떤 의무가 생기는지를 같이 봐야 합니다.
둘째, 안전자산이라는 말은 신용에 관한 말일 뿐입니다. 길트는 떼일 위험이 거의 없는 자산이었고, 이 사건 내내 영국 정부의 지급 능력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산의 가격 변동이 수백 개 기금의 생존 문제가 됐습니다. 어떤 자산이 담보로 널리 쓰이고 레버리지의 토대가 되는 순간, 그 자산의 가격 변동은 단순한 평가손이 아니라 현금 요구로 바뀝니다. 안전하다는 평가와 변동성이 작다는 평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셋째, 시장이 가장 비싸게 매긴 것은 숫자가 아니라 설명이었습니다. 450억 파운드라는 감세 규모도 컸지만, 더 결정적이었던 것은 그 구멍을 무엇으로 메울지에 대한 문장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신뢰성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잃는 순간 금리로 즉시 청구서가 날아옵니다. 반대로 영란은행이 필요한 만큼 사겠다고 했을 때 실제 매입은 상한의 3분의 1에도 못 미쳤습니다. 같은 자산시장에서 말의 신뢰도가 양쪽으로 작동한 흔치 않은 기록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건은 개인투자자에게도 같은 구조로 반복됩니다. 빌린 돈이나 증거금을 써서 포지션을 들고 있으면, 방향을 맞게 잡았더라도 중간 변동을 견디지 못해 먼저 정리당할 수 있습니다. 수익률보다 버티는 기간이 먼저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지만, 수천억 파운드를 운용하는 기관들이 열흘 만에 증명해 버렸습니다. 어떤 종목이나 자산을 사고팔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60펜스짜리 상추가 한 나라의 재정 발표보다 오래 버틴 그 2주를 떠올려 보면, 무엇을 먼저 점검해야 하는지는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