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튤립 버블, 통설과 기록을 갈라서 읽기

1637년 2월 5일 네덜란드 알크마르에서 한 경매가 열렸습니다. 전해 초여름에 세상을 떠난 보우터 빈켈이라는 남자가 남긴 튤립 구근을 그의 어린 자녀 일곱 명 몫으로 처분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날 하루에 모인 돈이 약 9만 굴덴, 가장 비싼 구근 한 개가 5,200굴덴이었습니다. 숙련 장인의 한 해 수입이 150에서 350굴덴 정도였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꼬리가 하나 붙습니다. 그 돈이 실제로 끝까지 걷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튤립 버블은 역사상 최초의 자산 거품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모든 투자 입문서에 등장합니다. 익숙한 판본은 이렇습니다. 네덜란드 사람 전부가 꽃 알뿌리에 미쳤고, 집을 팔아 구근을 샀고, 거품이 터지자 수많은 사람이 파산해 운하에 몸을 던졌고, 나라 경제가 수십 년간 주저앉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20년 사이 당대 문서를 직접 뒤진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결론은 이 판본과 상당히 다릅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여기입니다. 확인되는 사실이 통설보다 시시한 것이 아니라, 통설이 왜 그렇게 커졌는지를 따라가는 쪽이 오히려 더 재미있습니다. 이 글은 문서로 확인되는 것과 후대에 덧붙은 것을 되도록 갈라서 적어보려 합니다.

바이러스가 그린 무늬

튤립은 본래 중앙아시아 초원의 꽃으로, 오스만 제국을 거쳐 1590년대에 네덜란드로 들어왔습니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1602년에 세워진 동인도회사와 1609년에 문을 연 암스테르담 은행을 발판으로 유럽 무역의 중심이 되어 있었고, 도시에는 여윳돈을 가진 상인과 장인 계층이 두텁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정원에 희귀한 꽃을 심는 일은 교양과 지위를 보여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튤립은 그 수요에 정확히 들어맞는 상품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특히 탐낸 것은 꽃잎에 붓으로 그린 듯 불규칙한 줄무늬가 들어간 변종이었습니다. 당시 재배자들은 이 무늬를 만드는 방법을 알지 못해, 색 가루를 흙에 뿌려보거나 미신에 가까운 방법들을 시도했습니다. 이 무늬가 튤립 모자이크 바이러스에 감염된 결과라는 사실은 20세기에 들어서야 밝혀졌습니다. 바이러스에 걸린 구근은 자라는 속도가 느리고 번식도 더뎠는데, 바로 그 희소성이 값을 밀어 올렸습니다.

가장 유명한 품종은 흰 바탕에 붉은 불꽃 무늬가 올라온 셈페르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1620년대에 세상에 존재하는 구근이 열두 개 남짓뿐이었다고 전해지고, 1623년에는 열 개를 1만 2천 굴덴에 사겠다는 제안이 있었는데 소유자가 팔지 않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 품종의 주인은 암스테르담의 유력 정치인 아드리안 파우였고, 그는 구근을 내놓기보다 정원에 거울을 세워 몇 송이를 여러 송이처럼 보이게 즐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미 한 가지가 드러납니다. 전설처럼 인용되는 최고가는 실제로 치러진 값이 아니라 거절된 제안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땅속에 있는 것을 파는 기술, 윈트한델

튤립에는 거래하기 까다로운 성질이 있었습니다. 꽃은 봄에 피고, 구근은 6월쯤 캐내 가을에 다시 심어야 합니다. 실물을 눈으로 보고 사고팔 수 있는 기간이 1년에 몇 달뿐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고 싶은 쪽은 계절을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1630년대 중반 상인들은 아직 땅속에 있는 구근을 두고 내년 여름에 얼마로 인수하겠다는 계약서를 미리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선물거래라고 부르는 방식, 즉 물건은 나중에 받되 가격은 지금 정해두는 거래의 초기 형태입니다. 구근은 땅속에 있고 돈도 아직 움직이지 않았으니, 실제로 오가는 것은 종이 한 장뿐이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것을 윈트한델, 즉 바람 장사라고 불렀습니다.

거래 장소는 증권거래소가 아니라 여관과 술집에 모인 콜리지라는 비공식 모임이었습니다. 거래가 성립하면 양쪽은 포도주값이라 부르는 수수료를 냈는데, 거래액의 2.5퍼센트에 최대 3굴덴이라는 상한이 붙어 있었습니다. 상한이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은 이 모임이 즉흥적인 광기가 아니라 나름의 관행을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다만 그 관행에는 큰 구멍이 하나 있었습니다.

네덜란드 당국은 이미 1610년부터 여러 차례 포고를 내려, 실물 없이 가격 차이만 주고받는 선도 계약에 법적 강제력을 주지 않겠다고 못 박아두었습니다. 1621년과 1630년, 1636년에도 비슷한 조치가 반복됐습니다. 다시 말해 튤립 계약서는 처음부터 법정에서 집행하기 어려운 종이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의 체면과 신용을 믿고 서명했습니다. 뒤에 벌어질 일의 성격은 이 지점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습니다.

문서로 확인되는 가격들

그럼 값은 실제로 얼마나 올랐을까요. 경제학자 피터 가버는 1633년부터 1637년까지 39개 품종, 161개 구근의 거래 기록을 모았는데, 이것이 이 사건에 남아 있는 가격 자료의 상당 부분입니다. 숫자가 이 정도로 적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튤립 버블의 차트처럼 떠올리는 매끄러운 곡선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확인되는 상승은 분명 가팔랐습니다. 스비서라고 불린 비교적 흔한 품종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2월 사이에 값이 열두 배가 됐습니다. 역사학자 앤 골드거가 문서에서 찾아낸 가장 비싼 영수증은 5,000굴덴으로, 1637년에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다만 같은 연구에서 300굴덴, 즉 숙련 장인의 한 해 수입을 넘는 값을 치른 매수자는 모두 37명이었습니다. 비싼 거래는 분명히 있었지만, 그런 거래를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꺼낸 알크마르 경매는 이 사건에서 가장 상세하게 남은 하루입니다. 일흔 개의 주요 품목과 자루 단위로 묶어 판 하급 구근을 합쳐 약 9만 굴덴이 적혔고, 그 가운데 2만 1,467굴덴은 경매 전 개별 매매에서, 5만 2,923굴덴은 본 경매의 일흔 개 품목에서 나왔습니다. 하필 그날이 가격의 정점 무렵이었으니, 가난했던 아이들은 서류상 하루아침에 큰 부자가 됐습니다. 다만 그 돈이 어떤 절차로 얼마나 걷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같은 달 다른 경매에서 바이스로이 품종에 매겨진 4,200굴덴 역시 끝까지 지급되지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바로 그 무렵 시장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골드거가 공증 기록과 법원 문서에서 이름까지 확인한 거래 참가자는 350명 안팎이었습니다. 직업을 보면 성공한 상인과 숙련 장인이 중심이었고, 같은 업종이나 친척, 교회를 통해 서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굴뚝 청소부와 하녀까지 뛰어들었다는 묘사는 이 명단에서 확인되지 않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것은 전 국민의 광풍이 아니라, 좁고 서로 아는 사람들 사이의 시장이었습니다.

1637년 2월, 응찰자가 사라졌다

무너지는 과정은 요란하지 않았습니다. 1637년 2월 초 하를럼의 한 경매에서 경매인이 값을 몇 차례 내렸는데도 응찰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기록이 당대 자료에 남아 있습니다. 왜 그날 매수자가 사라졌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구근 공급이 늘었다는 설명, 땅속에 있는 물건의 품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설명, 그 무렵 하를럼을 덮친 역병으로 거래자들이 빠졌다는 설명이 함께 거론됩니다.

확실한 것은 속도였습니다. 2월 5일 하루에도 서로 전혀 다른 가격에 98건의 거래가 기록될 만큼 시장은 이미 갈피를 잃고 있었습니다. 2월 7일 위트레흐트의 재배자들은 암스테르담에서 열릴 회의에 보낼 대표를 급히 뽑았습니다. 사겠다는 사람이 사라진 시장에서는 호가가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불과 며칠 전 알크마르에서 적힌 9만 굴덴이라는 숫자가 종이 위의 숫자로 남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6월 인수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매수자들은 2월에 이미 계약서를 들고 와도 돈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습니다. 매도자들은 내년 여름에 받기로 한 돈을 포기할 수 없었고, 양쪽 모두 상대가 약속을 어겼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의 진짜 무대는 이 지점부터 꽃밭이 아니라 법정과 시청으로 옮겨갑니다.

법원이 판단을 거부했다

1637년 2월 24일 암스테르담에 모인 재배자 대표들은 절충안을 내놓았습니다. 1636년 11월 30일 이후에 작성된 계약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선택권으로 해석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매수자가 수수료만 내고 계약을 없앨 수 있게 해주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10퍼센트 선이 거론됐고, 그해 5월 하를럼 시는 계약 금액의 3.5퍼센트만 내면 계약을 취소할 수 있게 했습니다.

상급 법원인 홀란트 법원은 끝까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법으로 강제력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해둔 거래였으니 끼어들 근거가 약했습니다. 결국 분쟁은 도시별 중재와 당사자 사이의 합의로 흘러갔고, 대부분의 계약은 그냥 이행되지 않은 채 흐지부지됐습니다. 돈이 거의 오가지 않았기 때문에, 장부상의 거대한 숫자는 실제 손실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골드거가 사료에서 확인한 가장 깊은 상처는 돈이 아니라 신용이었습니다. 100굴덴이든 1,000굴덴이든 지급하겠다고 서명한 사람이 그 약속을 깨는 일이, 상업과 신용 관계로 굴러가던 사회에 문화적 충격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체면을 담보로 움직이던 거래망에 금이 간 것이 이 사건의 실제 비용에 가깝습니다.

그 이야기는 어디서 커졌나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극적인 판본은 어디서 왔을까요. 큰 몫은 1841년 영국 작가 찰스 매케이가 쓴 대중의 미망과 광기라는 책에 있습니다. 매케이는 나라 전체가 미쳤고 멀쩡한 상인들이 거지가 됐다고 썼습니다. 그런데 그가 근거로 삼은 자료는 당대의 거래 기록이 아니라, 사치와 탐욕을 꾸짖기 위해 쓰인 1637년 전후의 풍자 팸플릿들이었습니다.

그 팸플릿들은 애초에 사실 보도를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익명으로 유포된 바에르몬트와 가르고트의 대화처럼, 돈에 눈먼 투기꾼을 조롱하며 절제를 설교하는 글이 많았습니다. 선원이 귀한 구근을 양파로 착각해 청어와 함께 먹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런 교훈담 계열에서 나왔고, 실제 사건으로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운하의 저택이나 밀 수레와 소와 버터를 구근 하나와 맞바꿨다는 목록 역시 거래 영수증이 아니라 이런 글에 등장하는 서술입니다.

골드거는 파산한 사람을 한 명도 찾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역시 운하에 몸을 던진 사람도, 세상이 놀랄 만한 파산도 없었다고 정리합니다. 튤립 파동 뒤에도 네덜란드의 무역과 금융은 멈추지 않았고, 황금시대라 불리는 번영은 수십 년 더 이어졌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통설과 같습니다. 튤립 가격은 끝내 예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오랫동안 내려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사건에서 가장 쓸 만한 교훈은 거품은 터진다는 문장이 아닙니다. 그건 이미 모두가 아는 말입니다. 오히려 눈여겨볼 것은, 400년 가까이 반복돼 온 이 이야기의 숫자 대부분이 제대로 검증되지 않은 채 인용돼 왔다는 사실입니다. 시장에서 떠도는 극적인 사례는 대개 누군가의 주장을 또 누군가가 베껴 쓴 결과일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만합니다.

두 번째는 계약의 성질입니다. 튤립 계약서가 무더기로 휴지가 된 결정적 이유는 값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그 계약이 법정에서 집행될 수 없는 종류였기 때문입니다. 값이 오르는 동안에는 아무도 그 조건을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사는지보다 어떤 조건으로 사는지가 결과를 가른 사례입니다.

세 번째는 손실의 모양입니다. 돈이 거의 움직이지 않은 덕분에 금전적 피해는 전설보다 훨씬 작았지만, 서로를 믿고 거래하던 관계는 회복이 더뎠습니다. 숫자로 적히는 손실보다 신뢰가 깎이는 손실이 더 오래 남는다는 점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급등하는 가격 앞에서 이번엔 다르다는 말이 나올 때, 무엇이 정말 다르고 무엇이 똑같은지 직접 나눠 적어보는 습관이 그래서 쓸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