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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츠에 무너진 스위스, 무엇으로 되살아났나

1969년 12월 25일, 도쿄의 백화점에 손목시계 한 점이 놓였습니다. 세이코의 쿼츠 아스트론 35SQ, 가격은 45만 엔이었습니다. 1966년에 나온 토요타 코롤라의 출고가가 43만 2천 엔이었으니, 시계 한 개가 자동차 한 대 값이었던 셈입니다. 금으로 만든 초기 물량 100개는 일주일 만에 다 팔렸습니다. 그런데 이 시계가 시계 업계를 흔든 이유는 가격이 아니었습니다.

오차가 한 달에 5초 안쪽, 1년으로 따져도 1분 정도였습니다. 당시 스위스가 자랑하던 최고급 기계식 시계는 잘 조정해도 하루에 몇 초씩 오차가 났습니다. 쿼츠는 수정이라는 돌에 전기를 흘리면 아주 일정한 횟수로 떨리는 성질을 이용해 시간을 세는 방식입니다. 장인이 몇 달을 들여 다듬은 톱니바퀴가, 값싼 돌 조각과 배터리에 정확도에서 완패한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이야기의 매운 부분이 나옵니다. 쿼츠 손목시계를 먼저 연구한 곳은 일본이 아니라 스위스였습니다. 스위스 업계는 이미 1960년대에 공동 연구소를 세워 쿼츠 시계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기술을 먼저 손에 쥐고 있었는데도, 그 기술로 시장을 잃은 쪽은 스위스였습니다.

스위스가 먼저 만들었고, 스위스가 먼저 밀어냈습니다

1962년, 스위스 뇌샤텔에 전자시계센터라는 이름의 공동 연구소가 세워졌습니다. 약 20개 시계 제조사가 돈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고, 목표는 전자식 시계 기술의 확보였습니다. 개별 회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연구를 함께 하자는 발상은 대단히 합리적이었고, 실제로 이 연구소는 쿼츠 무브먼트 시제품을 만들어냈습니다.

1970년 바젤 시계 박람회에서 스위스는 베타 21이라는 쿼츠 아날로그 시계를 내놓았습니다. 세이코보다 몇 달 늦은 시점이었습니다. 같은 박람회에서 오메가, 라도, 유니버설, 미국의 뷜로바까지 쿼츠 시계를 전시했습니다. 기술은 이미 여러 곳에 퍼져 있었고,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스위스 업계의 주류는 쿼츠를 시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시계란 기계 장치이고, 정확도는 장인의 솜씨로 얻는 것이라는 믿음이 산업 전체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쿼츠는 시계라기보다 전자부품에 가깝다는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업계가 가진 자산 자체가 전환을 막았습니다. 톱니바퀴와 태엽을 깎는 수백 개 부품 협력사, 수십 년간 길러낸 숙련 노동자, 기계식이라는 사실에 값을 매기던 브랜드 서사가 모두 기계식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반대로 일본 업체들은 정확도 경쟁이 아니라 원가와 양산에 집중했습니다. 쿼츠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찍어내고 가격을 계속 내렸습니다. 처음 자동차 한 대 값이었던 쿼츠 시계는 몇 해 만에 보통 사람이 살 수 있는 물건이 됐고, 곧 홍콩 등지에서 아주 싼 쿼츠 시계가 쏟아졌습니다. 1980년에는 일본이 생산 수량에서 스위스를 앞질렀습니다.

숫자로 본 붕괴

1970년 무렵 스위스는 세계 시계 시장의 약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종사자는 약 9만 명, 시계 관련 업체는 1,600곳이 넘었습니다. 시계 계곡이라 불리는 쥐라 산맥 지역 경제는 사실상 이 산업 하나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벌어진 일은 완만한 하락이 아니라 붕괴였습니다.

1983년에 스위스 시계 산업의 고용은 약 2만 8천 명으로 줄었습니다. 업체 수는 600곳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다른 집계는 1984년 종사자를 약 3만 3천 명으로 잡습니다. 어느 쪽 숫자를 쓰더라도 13년 남짓한 사이에 일자리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수출 역시 정점이었던 1974년의 절반 수준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축소는 기업 몇 곳의 실패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부품을 깎던 공방이 문을 닫으면 그 부품을 받던 조립 업체가 멈추고, 조립이 멈추면 판매망이 말라붙습니다. 한 지역에 촘촘히 엮인 산업이었기에 고리 하나가 끊기면 전체가 흔들렸습니다. 숙련 기술자들이 다른 업종으로 떠나면서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손실도 쌓였습니다.

업계를 떠받치던 두 개의 큰 묶음도 위태로웠습니다. 론진과 라도를 거느린 아수아그, 오메가와 티소를 가진 에스에스아이에이치가 모두 사실상 부실이었습니다. 돈을 빌려준 은행들이 채권자로서 경영에 개입했고, 은행의 관심은 산업의 미래가 아니라 대출금 회수였습니다.

청산 보고서를 쓰러 온 컨설턴트

이 대목에서 니콜라스 하이에크가 등장합니다. 1928년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 취리히에 하이에크 엔지니어링이라는 경영 컨설팅 회사를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시계 장인도, 시계 집안 출신도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초 은행들은 그에게 부실해진 두 시계 그룹을 어떻게 처리할지 검토해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사실상 정리 방안을 써 오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가 장부를 열어보고 발견한 것은 기술의 부족이 아니라 조직의 혼란이었습니다. 하이에크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아수아그 한 곳만 해도 100개가 넘는 별개 회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같은 부품을 여러 계열사가 따로 만들고, 브랜드들이 서로 비슷한 가격대에서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정신 나간 구조라고 불렀습니다. 즉 스위스가 진 이유의 절반은 일본이 아니라 내부에 있었다는 진단이었습니다.

그가 내놓은 결론은 청산이 아니라 통합이었습니다. 1983년 3월 아수아그와 에스에스아이에이치가 합쳐졌고, 이 회사는 1986년 에스엠에이치로, 1998년 스와치 그룹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무브먼트와 부품 생산은 에타라는 한 축으로 몰아 규모의 경제를 만들었습니다. 브랜드는 값이 겹치지 않게 계단처럼 다시 배치했습니다. 어느 브랜드가 어느 가격대를 맡는지 정리하는 일이 신기술 개발만큼 중요한 작업이었습니다.

51개 부품으로 만든 반격

기술 쪽의 반격은 에타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에른스트 톰케가 이끄는 팀에서 엘마르 모크와 자크 뮐러가 전혀 다른 방식의 시계를 설계했습니다. 금속 케이스에 부품을 차곡차곡 넣는 대신, 플라스틱 본체에 부품을 직접 붙여 케이스 자체를 시계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부품 수가 51개로 줄었습니다. 당시 일반적인 아날로그 시계 부품이 약 91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절반 수준입니다.

부품이 줄자 조립을 기계에 맡길 수 있게 됐습니다. 사람 손이 적게 들어가면 인건비가 높은 스위스에서도 싼 시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즉 이 시계의 핵심은 디자인이 아니라 원가 구조였습니다. 수리를 전제로 하지 않는 설계였기 때문에 뒷면을 열 필요도 없었습니다. 스위스가 아시아의 저가 공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장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제품을 다시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1983년 3월 1일, 스와치가 취리히에서 12개 모델로 첫 선을 보였습니다. 가격은 39.90에서 49.90 스위스프랑이었고, 그해 가을에 50프랑으로 통일됐습니다. 이름은 두 번째 시계를 뜻하는 영어 표현을 줄인 것입니다. 마케팅 컨설턴트 프란츠 슈프레허와 함께 만든 이 개념이 진짜 전환점이었습니다. 정확한 시계 한 개를 평생 차는 물건이 아니라, 옷이나 신발처럼 기분과 상황에 따라 바꿔 차는 물건으로 시계를 다시 정의한 것입니다.

시계가 패션 상품이 되면 게임의 규칙이 바뀝니다. 한 사람이 시계를 여러 개 살 이유가 생기고, 계절마다 새 모델을 내놓을 명분이 생기고, 값을 정확도가 아니라 디자인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판매 목표는 1983년 100만 개, 그 다음 해 250만 개로 잡혔습니다. 실제로는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250만 개를 넘겼고, 1992년에는 누적 1억 개에 이르렀습니다. 하이에크와 스위스 투자자들은 1985년에 이 회사의 과반 지분을 확보했고, 그는 1986년부터 회장 겸 최고경영자를 맡았습니다.

기계식 시계는 사치품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스와치가 저가 시장에서 방어선을 세우는 동안, 스위스는 더 근본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기계식 시계로 정확도 경쟁을 하려는 시도를 사실상 접은 것입니다. 쿼츠보다 정확한 기계식 시계는 만들 수 없고, 만들 필요도 없다는 인정이었습니다. 대신 기계식 시계를 손으로 만든 물건, 수십 년을 쓰고 자식에게 물려주는 물건으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재정의가 성공하자 값을 매기는 기준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오차가 아니라 마감, 희소성, 브랜드의 역사, 손으로 조립했다는 사실이 가격표를 정당화했습니다. 같은 그룹 안에서 오메가와 롱진, 블랑팡 같은 브랜드가 상위 가격대로 다시 올라갔고, 그룹 밖의 고급 브랜드들도 같은 방향을 걸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는 기계식 수요가 되살아나는 흐름이 뚜렷해졌습니다.

결과는 숫자로 확인됩니다. 2025년 스위스 시계 수출액은 약 244억 스위스프랑이었고, 수출 수량은 1,460만 개였습니다. 전성기의 스위스가 팔던 수량보다 훨씬 적은데, 금액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큽니다. 한 개당 값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같은 산업이 살아남았다기보다, 다른 성격의 산업으로 갈아탔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고용도 상당 부분 회복됐습니다. 2024년 집계로 종사자는 6만 5천 명을 넘었습니다. 1970년의 9만 명에는 못 미치지만 1983년 바닥의 두 배 이상입니다. 다만 이 회복에는 대가가 따라붙습니다. 2025년 수출액은 전년보다 1.7퍼센트, 수량은 4.8퍼센트 줄었습니다. 사치품 수요에 기대는 구조는 경기와 특정 국가의 소비 심리에 훨씬 민감하게 흔들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이야기가 주는 첫 번째 교훈은 불편합니다. 기술을 먼저 가졌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스위스는 쿼츠를 남보다 먼저 만들었지만, 그 기술이 자기 사업의 근거를 부순다는 점 때문에 밀어냈습니다. 필름 시절의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를 먼저 만들고도 같은 길을 걸었다는 사례도 자주 함께 언급됩니다. 잘 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상황은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데 스위스 쪽에서 더 눈여겨볼 대목은 그 다음입니다. 스위스는 쿼츠 시장을 되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정확도라는 운동장에서 일본과 다시 싸우는 대신, 운동장을 두 개로 나눴습니다. 낮은 가격대는 부품 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조립을 자동화해 원가 구조 자체를 바꿔서 지켰습니다. 높은 가격대는 제품의 의미를 바꿔서 지켰습니다.

개인투자자가 가져갈 관점은 여기입니다. 어떤 산업이 새로운 기술에 밀린다는 소식이 들릴 때, 그 산업이 정말 사라지는지 아니면 형태를 바꾸는지 구분해 보는 일입니다. 두 경우는 겉으로 비슷하게 보이지만 이후의 전개가 전혀 다릅니다. 사라지는 산업은 수량과 금액이 함께 줄고, 형태를 바꾸는 산업은 수량이 줄어도 금액이 유지되거나 늘어납니다.

그래서 수량과 금액을 나눠 보는 습관이 유용합니다. 판매 대수는 줄었는데 매출이 늘었다면 한 개당 값이 올라간 것이고, 그 배경에 제품의 성격 변화가 있는지 확인해 볼 여지가 생깁니다. 반대로 수량이 늘고 있는데 금액이 정체된다면 값을 깎아 물량을 채우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숫자 하나가 아니라 두 숫자의 관계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시간을 보는 도구는 대부분 휴대전화입니다. 그런데도 손목시계 시장은 사라지지 않았고, 값이 가장 비싼 시계들은 오히려 가장 오래된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시장이 무엇에 값을 매기는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바뀌고, 그 변화를 알아차리는 일은 기술의 우열을 판단하는 일과 다른 종류의 관찰입니다. 산업의 흥망을 읽을 때 기술만 보아서는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위스의 20년은 꽤 분명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