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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안전한 자산이 은행을 무너뜨렸다

2023년 3월 9일 목요일 하루 동안, 미국 실리콘밸리은행에서 빠져나가겠다고 요청된 예금은 420억 달러였습니다. 이 은행 전체 예금의 약 4분의 1이 단 하루 만에 문밖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날 영업 마감 시점에 은행의 현금 잔고는 마이너스 9억 5,800만 달러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은행은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옛날 영화에 나오는 장면과는 달랐습니다. 창구 앞에 줄을 선 사람도, 셔터를 두드리는 군중도 없었습니다. 스타트업 창업자들과 벤처투자자들이 단체 대화방에서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각자 스마트폰을 열어 이체 버튼을 눌렀을 뿐입니다.

더 기이한 점은 무너진 이유입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은 부동산 거품이나 부실 대출로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은행이 들고 있던 것은 미국 국채와 정부 보증 채권, 그러니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불리는 자산이었습니다. 그 안전한 자산이 어떻게 2,090억 달러짜리 은행을 이틀 만에 주저앉혔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스타트업의 돈이 모이던 은행

실리콘밸리은행은 1983년에 세워진, 이름 그대로 실리콘밸리 생태계를 위한 은행이었습니다. 벤처캐피털이 스타트업에 투자를 집행하면 그 돈은 이 은행 계좌로 들어왔고, 창업자들은 여기서 급여를 주고 임대료를 냈습니다. 업계의 돈이 한곳에 모이는 구조였습니다.

2020년과 2021년은 이 은행에게 황금기였습니다. 코로나19 이후 금리가 바닥까지 내려가면서 벤처 투자금이 쏟아졌고, 그 돈은 고스란히 예금으로 쌓였습니다. 2020년 3월 620억 달러였던 예금은 1년 만인 2021년 3월 1,240억 달러로 두 배가 됐습니다. 은행에게 예금은 곧 원료입니다.

문제는 그 원료를 쓸 곳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입니다. 보통 은행은 예금을 받아 대출로 굴려 이자 차익을 남깁니다. 그런데 스타트업은 대출보다 지분을 넘기고 투자를 받아 돈을 구합니다. 예금은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대출 수요는 그만큼 늘지 않았습니다. 남는 돈을 어딘가에는 넣어야 했습니다.

은행이 고른 답은 채권이었습니다. 2022년 말 기준 총자산은 2,090억 달러, 예금은 1,750억 달러였고, 이 가운데 1,170억 달러가 채권이었습니다. 신용도로만 보면 흠잡을 데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망하지 않는 한 원금이 떼일 걱정은 없는 자산이었으니까요.

안전한 자산에도 두 번째 위험이 있습니다

채권 투자에는 두 종류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돈을 빌려 간 쪽이 갚지 못하는 신용위험이고, 다른 하나는 시중 금리가 오를 때 내가 가진 채권의 값이 떨어지는 금리위험입니다. 새로 나오는 채권이 더 높은 이자를 줄수록, 예전에 낮은 이자로 발행된 채권은 헐값이 됩니다. 미국 국채는 신용위험이 사실상 없지만, 금리위험은 피하지 못합니다.

여기에 회계 규칙이 한 겹 더 얹힙니다. 은행은 보유 채권을 만기보유와 매도가능으로 나눠 분류하는데, 만기까지 갖고 있겠다고 분류한 채권은 시세가 떨어져도 장부상 손실로 잡지 않습니다. 반면 팔 수도 있다고 분류한 채권은 시세 변동이 자본에 반영됩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채권 1,170억 달러 가운데 913억 달러가 만기보유, 260억 달러가 매도가능이었습니다.

2022년 한 해 동안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유례없는 속도로 끌어올렸습니다. 저금리 시절에 사둔 장기 채권의 시장 가격은 그만큼 주저앉았습니다. 2022년 말 기준 실리콘밸리은행의 만기보유 채권에서 발생한 평가손실은 150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평가손실이란 아직 팔지 않아 확정되지 않았을 뿐, 지금 시세로 계산하면 이미 입은 손실을 말합니다.

그 150억 달러라는 숫자가 무서운 이유는 규모 때문입니다. 이는 이 은행의 자기자본과 맞먹는 크기였습니다. 즉 장부에만 잡히지 않았을 뿐, 시세대로 따지면 자본이 거의 다 사라진 상태였던 셈입니다. 팔지 않으면 손실이 아니라는 회계 규칙이 만든 착시였습니다.

금리 위험을 줄이는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방법은 수익을 깎아먹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쓰이지 않았습니다. 2023년 4월 연방준비제도의 마이클 바 부의장이 내놓은 보고서는 이 사안을 두고 경영 실패의 교과서적 사례라고 표현했고, 감독 당국 역시 위험 신호를 알고도 충분히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스스로 울린 경보, 3월 8일

위기의 도화선은 신용평가사였습니다. 그 주 초 무디스가 채권 평가손실을 이유로 신용등급을 내리겠다는 뜻을 은행에 통보했습니다. 은행은 골드만삭스의 자문을 받아 대응책을 짰습니다. 매도가능으로 분류된 채권 약 210억 달러어치를 팔아 유동성을 확보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18억 달러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22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증자를 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증자란 새로 주식을 발행해 투자자에게 팔고 자금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자본을 두껍게 만들어 은행을 튼튼하게 하려는 조치이니, 원래대로라면 안심 신호로 읽혀야 합니다. 실제로 사모펀드 제너럴애틀랜틱이 5억 달러를 넣기로 잠정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3월 8일 저녁 발표된 이 자료를 시장은 정반대로 읽었습니다. 손실을 감수하고 채권을 팔아야 할 만큼 현금이 급하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주식까지 찍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하필 같은 날 가상자산 업계와 거래하던 실버게이트은행이 영업 종료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은행권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이 겹쳤습니다.

증자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투자자에게 검토 기간을 보장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최소 하루는 걸리는 절차였습니다. 그 하루를 시장이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3월 9일 주가는 60퍼센트 폭락해 106.04달러가 됐고, 주가가 그렇게 빠진 회사의 주식을 사겠다는 투자자는 남지 않았습니다. 증자는 무산됐습니다. 은행을 구하려던 발표가 은행을 무너뜨린 방아쇠가 된 것입니다.

역사상 가장 빠른 뱅크런

뱅크런이란 예금자들이 은행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한꺼번에 돈을 빼는 현상을 말합니다. 은행은 받은 예금을 대출과 채권으로 굴려두기 때문에 모든 예금자가 동시에 돈을 달라고 하면 어떤 건전한 은행도 버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뱅크런은 실제로 은행이 부실한지와 무관하게, 남들이 뺄 것 같다는 예상만으로도 현실이 됩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예금자 구성은 이 위험을 극단으로 키웠습니다. 예금자가 수천만 명의 개인이 아니라, 같은 행사에 참석하고 같은 대화방에 속한 소수의 스타트업과 벤처캐피털이었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력 벤처캐피털이 투자한 회사들에 자금을 빼두라고 권고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권고는 곧 사실상의 지시처럼 퍼졌습니다.

여기에 기술이 붙었습니다. 과거의 뱅크런은 지점 앞에 줄을 서야 했고, 그 줄의 길이가 다시 공포를 불렀습니다. 2023년의 뱅크런은 앱에서 클릭 몇 번이면 끝났습니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와 돈이 움직이는 속도가 둘 다 실시간이 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3월 9일 하루 420억 달러라는 숫자였습니다.

예금보험 문제도 컸습니다. 미국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예금자 한 명당 25만 달러까지 보호합니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은행은 예금의 약 86퍼센트에서 89퍼센트가 이 한도를 넘는 돈이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업 계좌에는 직원 수십 명의 다음 달 급여와 운영자금이 들어 있습니다. 25만 달러는 개인에게는 큰돈이지만 회사 운영자금으로는 며칠치에 불과합니다.

보호받지 못하는 예금자는 조금이라도 불안하면 즉시 빼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기다렸다가 은행이 문을 닫으면 원금을 얼마나 돌려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3월 10일 금요일, 캘리포니아주 금융보호혁신국이 은행을 폐쇄하고 연방예금보험공사를 관재인으로 지정했습니다. 발표에서 폐쇄까지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주말 사이에 내려진 결정, 그리고 그 뒤

주말 동안 당국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3월 12일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시스템 리스크 예외를 적용해 25만 달러 한도를 넘는 예금까지 전액 보호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시그니처은행도 문을 닫았습니다. 연방준비제도는 은행 보유 국채를 시세가 아닌 액면가 기준으로 담보 잡아 돈을 빌려주는 새 대출 창구도 만들었습니다. 평가손실 때문에 현금이 막히는 상황을 끊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3월 13일 은행은 가교은행 형태로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3월 26일에는 퍼스트시티즌스가 예금 약 1,190억 달러와 대출 720억 달러를 165억 달러 할인된 값에 넘겨받았습니다. 두 달 뒤인 5월 1일에는 자산 약 2,290억 달러의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이 무너져 JP모건체이스에 넘어갔습니다. 이로써 실리콘밸리은행은 미국 역사상 세 번째로 큰 은행 파산으로 순위가 밀렸습니다.

비용은 업계가 나눠 졌습니다. 연방예금보험공사는 이 은행 정리에 예금보험기금에서 약 200억 달러의 손실이 날 것으로 추정했고, 2023년 11월 대형 은행들에 총 163억 달러 규모의 특별부담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확정했습니다. 보호받지 못할 예금을 전액 보호한 대가를 누가 낼 것인가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규제 논의도 뒤따랐습니다. 2018년 미국은 자산 규모가 일정 기준에 못 미치는 은행의 유동성 규제와 스트레스 테스트를 완화했는데, 실리콘밸리은행이 바로 그 수혜 구간에 있었습니다. 사고 이후 당국은 자본 규제 강화, 장기채무 의무 보유, 채권 평가손실을 자본에 반영하는 규칙 확대 등을 제안했습니다. 다만 업계 반발과 정책 기조 변화 속에서 수정과 재제안이 반복되며 지금까지도 최종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책임을 가리는 절차도 별개로 진행됐습니다. 파산 절차와 투자자 소송, 당국 조사가 이어졌고 일부는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다만 특정 개인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는 법원과 당국의 판단이 최종적으로 내려진 뒤에야 말할 수 있는 영역입니다. 확정되지 않은 사안을 단정하는 것은 이 사건에서 배울 것을 오히려 흐립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첫 번째 교훈은 안전하다는 말이 언제나 같은 뜻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미국 국채는 떼일 걱정이 없다는 의미에서 안전하지만, 금리가 오르면 값이 떨어진다는 의미에서는 전혀 안전하지 않습니다. 어떤 자산을 안전하다고 부를 때는 어떤 위험에 대해 안전한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장부와 현실의 간극입니다. 팔지 않으면 손실이 아니라는 회계 처리는 평온한 시기에는 합리적인 규칙입니다. 그러나 손실이 현실이 되는 순간은 정확히 팔아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이고, 그런 상황은 대체로 가장 나쁜 가격에 찾아옵니다. 자산이 건전한가와 그것을 언제 현금으로 바꿔야 하는가는 전혀 다른 질문입니다.

세 번째는 정보의 속도입니다. 투명한 공시는 원칙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3월 8일의 발표는 시장을 안심시키는 대신 공포의 방아쇠가 됐습니다. 모두가 같은 정보를 동시에 보고 같은 결론에 이르러 같은 버튼을 누르는 환경에서는, 신뢰가 무너지는 시간이 며칠에서 몇 시간으로 줄어듭니다.

기업의 재무제표를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이 사건이 주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이 회사가 가진 자산의 값이 어떤 조건에서 흔들리는지, 그리고 돈이 갑자기 필요해질 때 무엇을 팔아야 하는지입니다. 손익계산서의 숫자보다 주석에 적힌 만기 구조와 조달 구조가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위험은 사고가 터지기 몇 달 전부터 공시 서류 안에 적혀 있었습니다. 다만 대부분이 읽지 않았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