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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란은행을 꺾은 하루, 1992년 검은 수요일

1992년 9월 16일 아침, 영국 재무부와 영란은행은 파운드화를 지키기 위해 두 시간 남짓 만에 기준금리를 두 번 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에 10%에서 12%로, 그리고 오후에는 다시 15%로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하루 사이 금리를 5%포인트 올리겠다는 것은 평시의 선진국 경제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파운드는 계속 떨어졌습니다.

그날 저녁 7시, 노먼 라몬트 재무장관이 재무부 청사 앞에 섰습니다. 영국이 유럽 환율 메커니즘에서 탈퇴한다는 발표였습니다. 오후에 약속했던 15% 금리는 실행되지도 못한 채 철회됐고, 금리는 이튿날 아침 원래의 10%로 돌아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 가운데 하나인 영란은행이, 자기 나라 통화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조지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있었습니다. 이 펀드가 그 한 판에서 벌어들인 돈은 1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후 소로스에게는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남자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다만 이 이야기를 한 천재 투자자의 무용담으로만 읽으면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진짜 주인공은 영국이 스스로 짊어진,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유럽의 환율 열차에 올라탄 이유

유럽 환율 메커니즘, 줄여서 ERM은 유럽 국가들이 자기네 통화끼리 환율을 좁은 범위 안에서만 움직이도록 서로 묶어둔 약속입니다. 장차 하나의 통화, 즉 유로를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이기도 했습니다. 참가국은 자국 통화가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려 하면 외환시장에서 직접 사고팔거나 금리를 조정해 되돌려놓아야 했습니다.

영국은 1990년 10월에 이 체제에 들어갔습니다. 중심 환율은 1파운드당 2.95마르크였고, 아래로는 2.77마르크선 밑으로 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야 했습니다. 당시 영국의 고민은 물가였습니다. 1980년대 후반의 과열로 물가 상승률이 높았는데, 물가 관리에서 가장 신뢰받던 독일 마르크에 파운드를 묶어두면 그 신뢰를 빌려올 수 있다는 계산이었습니다.

문제는 가입 환율이 파운드에 다소 후하게 매겨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영국의 물가와 생산성을 생각하면 파운드가 비싸게 평가됐다는 지적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1925년 처칠이 전쟁 전 환율 그대로 금본위제에 복귀했던 장면과 구조가 놀랄 만큼 닮아 있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금이 아니라 독일 마르크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입니다.

독일 통일이라는 예상 못 한 폭탄

1990년 독일이 통일됐습니다. 서독은 동독 지역 재건에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었고, 그 결과 독일 안에서 물가 압력이 커졌습니다. 물가 안정을 지상 과제로 삼는 독일 중앙은행 분데스방크는 금리를 높게 유지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독일 입장에서는 당연한 처방이었습니다.

여기서 ERM의 구조적 결함이 드러납니다. 참가국들이 마르크에 묶여 있다는 것은, 독일의 금리가 올라가면 다른 나라도 따라 올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돈이 이자 높은 독일로 빠져나가고 자국 통화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유럽 전체가 독일 경제 사정에 맞춘 처방을 함께 삼켜야 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1992년의 영국은 독일과 정반대 상황이었습니다.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경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실업률은 10% 가까이 올라 있었습니다. 영국에 필요한 처방은 금리 인하였습니다. 그러나 ERM에 남아 있으려면 독일을 따라 금리를 높게 유지해야 했습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약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장 참가자들은 이 불일치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경기 침체와 높은 실업을 언제까지 견딜 수 있을까. 고통이 임계점을 넘으면 결국 환율 약속을 포기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질문이 퍼지는 순간, 파운드 약세에 거는 베팅은 도박이 아니라 계산이 됩니다.

1992년 여름,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다

6월, 덴마크 국민투표에서 유럽 통합을 향한 마스트리흐트 조약이 부결됐습니다. 유럽 단일통화라는 목표 자체가 흔들린다는 신호였습니다. ERM이 유로로 가는 다리라면, 그 다리의 끝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약속을 지킬 이유가 약해지면 약속의 값도 함께 떨어집니다.

9월 들어 압력은 유럽 전역의 약한 통화로 번졌습니다. 9월 13일 이탈리아 리라가 평가절하됐습니다. 이는 시장에 중요한 사실을 알려줬습니다. ERM의 환율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며, 압력이 충분하면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나라가 무너지면 곧바로 다음 후보를 찾는 것이 시장의 생리입니다.

결정타는 말 한마디였습니다. 분데스방크 총재 헬무트 슐레징거의 발언이 9월 15일 언론에 보도됐는데, 한두 개 통화의 환율 조정이 더 필요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읽혔습니다. 독일이 파운드를 끝까지 지켜주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날 밤사이 파운드 매도 주문이 쌓였습니다.

9월 16일, 열두 시간의 공방

수요일 아침 시장이 열리자 파운드는 하한선을 향해 밀렸습니다. 영란은행은 보유한 외화를 내놓고 파운드를 사들이며 방어에 나섰습니다. 환율 방어란 결국 이런 것입니다. 시장이 내다 파는 자국 통화를 중앙은행이 외화를 써서 계속 받아주는 일입니다. 문제는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에는 바닥이 있고, 파는 쪽의 자금에는 뚜렷한 한계가 없다는 점입니다.

오전 10시 30분, 금리를 10%에서 12%로 올린다는 발표가 나왔습니다. 금리를 올리면 그 통화를 갖고 있을 이유가 커지므로 통화가 강해진다는 것이 교과서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이날 시장은 정반대로 읽었습니다. 경기 침체에 빠진 나라가 이렇게까지 무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증거라고 본 것입니다.

오후에 정부는 다음 날부터 금리를 15%로 올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파운드는 여전히 떨어졌습니다. 이 순간 영국 정부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개뿐이었습니다. 환율을 지키기 위해 경제를 더 망가뜨리거나, 환율을 포기하고 경제를 살리거나. 둘 중 어느 것도 명예로운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저녁 7시, 라몬트 재무장관이 ERM 탈퇴를 발표했습니다. 15% 인상은 없던 일이 됐고 금리는 12%로 유지됐다가 다음 날 10%로 돌아갔습니다. 영국 재무부가 나중에 집계한 이날의 손실은 1997년 추산으로 약 31억 파운드, 2005년 자료 공개 이후 수정치로는 약 33억 파운드였습니다. 사건 직후 떠돌던 130억에서 270억 파운드라는 숫자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하루치 손실로는 여전히 막대한 금액이었습니다.

소로스는 무엇을 보고 있었나

퀀텀펀드에서 이 기회를 먼저 알아본 사람은 소로스가 아니라 그의 운용 책임자 스탠리 드러켄밀러였습니다. 드러켄밀러는 영국의 경기 상황과 ERM 약속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하고 파운드 매도 포지션을 준비했습니다. 소로스의 역할은 방향을 찾은 것이 아니라, 판을 훨씬 크게 키우라고 밀어붙인 것이었습니다. 드러켄밀러 본인이 훗날 그렇게 설명했습니다.

이들이 취한 방식은 공매도였습니다. 공매도는 지금 갖고 있지 않은 자산을 빌려서 먼저 팔고, 나중에 값이 떨어지면 싸게 사서 되갚아 차익을 남기는 거래입니다. 퀀텀펀드는 9월 16일 시점에 100억 달러가 넘는 규모로 파운드를 팔아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 나라의 중앙은행을 마주 보고 선 개인 펀드로서는 유례를 찾기 어려운 규모였습니다.

이 베팅이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익과 손실의 크기가 대칭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영국이 ERM에 남는 데 성공하면 파운드는 하한선 근처에 머무니 손실은 제한적입니다. 반대로 영국이 버티지 못하면 파운드는 큰 폭으로 떨어집니다. 잃을 것은 적고 얻을 것은 큰 구조인데, 시장에서는 이런 상황을 두고 위험 대비 보상이 유리하다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퀀텀펀드가 이 거래로 얻은 이익은 10억 달러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다만 강조해둘 것이 있습니다. 소로스가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것이 아닙니다. 지킬 수 없는 환율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정책이 스스로 무너진 것이고, 소로스는 그 균열이 어디인지 정확히 짚었을 뿐입니다. 그가 없었어도 파운드는 그 가을 안에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패배한 쪽이 이긴 아이러니

검은 수요일은 영국 보수당 정부에 치명타였습니다. 경제를 관리할 능력이 있다는 평판이 하루 만에 사라졌고, 그 후유증은 1997년 총선 참패까지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날은 명백한 재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경제 자체는 정반대로 움직였습니다. 환율 약속이라는 족쇄가 풀리자 영국은 자기 경제 상황에 맞춰 금리를 내릴 수 있게 됐습니다. 파운드 가치가 떨어지면서 수출 기업의 가격 경쟁력도 살아났습니다. 영국 경제는 1993년에 2%대, 1994년에는 3%대 성장을 기록하며 오랜 침체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더 오래 남은 변화는 정책의 틀이었습니다. 환율을 목표로 삼을 수 없게 된 영국은 1992년 10월부터 물가상승률 자체에 목표치를 정하고 그에 맞춰 금리를 운용하는 방식으로 옮겨갔습니다. 물가안정목표제라고 부르는 이 방식은 1997년 영란은행이 금리 결정 권한을 독립적으로 행사하게 되면서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이 틀은 이후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채택한 표준이 됐습니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이날을 검은 수요일이 아니라 황금의 수요일로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굴욕적인 패배가 결과적으로는 잘못 채워진 수갑을 풀어준 날이었다는 뜻입니다. 잃은 것은 체면과 수십억 파운드였고, 얻은 것은 자기 경제에 맞는 정책을 쓸 자유였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첫째, 정부의 강력한 선언과 시장의 계산이 부딪히면 대개 계산이 이깁니다. 영국은 무제한 방어를 공언했고 금리를 하루에 두 번 올리겠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이 본 것은 결의의 크기가 아니라 그 결의를 지탱할 경제 체력이 있느냐였습니다. 말의 강도와 현실의 힘은 다른 것입니다.

둘째, 위기는 대개 뉴스가 터지기 훨씬 전부터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1992년 9월 16일의 폭발은 1990년의 가입 환율과 독일 통일이라는 두 조건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시장을 볼 때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을 보는 눈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셋째, 어떤 정책이 실패했다는 것과 그 실패가 나쁜 결과를 낳았다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은 지키려던 것을 잃었지만, 그 덕분에 더 오래 쓸 수 있는 정책 도구를 얻었습니다. 뉴스의 첫 문장과 최종 결과가 반대 방향인 경우는 생각보다 자주 있습니다. 시장을 오래 지켜보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그 간극을 견디며 끝까지 따라가 보는 인내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