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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털루 전설, 31년 뒤에 만들어진 이야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815년 6월, 벨기에의 진흙탕 벌판에서 나폴레옹이 무너지던 순간, 언덕 위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한 사내가 말을 돌려 해협으로 내달렸습니다. 어부에게 거금을 쥐여 주고 폭풍우 치는 바다를 건넌 그는 런던 증권거래소에 누구보다 먼저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태연히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로스차일드가 판다. 그 한 장면에 시장은 영국이 졌다고 읽었습니다. 국채 값이 폭락하자 그는 사람을 풀어 헐값에 쓸어 담았고, 이튿날 승전보가 도착하자 값은 치솟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2천만 프랑을 벌었다고 전해집니다. 정보가 곧 돈이라는 격언의 원조로 지금도 강연과 책에 자주 인용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거의 전부가 사실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전투가 끝나고 31년이 지난 뒤 파리에서 팸플릿 한 권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입니다. 게다가 그 팸플릿은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퍼뜨리기 위해 쓰인 글이었습니다. 오늘 할 이야기는 워털루에서 누가 돈을 벌었는가가 아니라, 그럴듯한 금융 전설을 어떻게 걸러 읽을 것인가입니다.

먼저 전설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전해지는 판본이 여럿입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직접 전장에 있었다는 판본이 있고, 유럽 전역에 전령과 비둘기로 짜인 사설 정보망을 미리 깔아 두었다는 판본도 있습니다. 어떤 판본에서는 그가 일부러 매도해 패전 소문을 퍼뜨렸다고 하고, 어떤 판본에서는 그저 침울한 표정으로 서 있었을 뿐인데 시장이 알아서 무너졌다고 합니다.

판본은 달라도 뼈대는 같습니다. 한 사람이 남들보다 결정적으로 빠른 정보를 쥐었고, 그것을 이용해 남들을 속였으며, 하룻밤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이 이후 한 가문이 세계 금융을 지배하게 된 출발점이라는 결론이 따라붙습니다.

이야기가 오래 살아남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구조가 너무 잘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극적인 무대가 있고, 천재적인 주인공이 있고, 한 번의 결정이 있고, 즉각적인 보상이 있습니다. 투자 이야기로서 이보다 기억하기 좋은 형태는 드뭅니다. 한국의 투자 교양서와 강연에서도 정보의 가치를 설명하는 단골 사례로 등장해 왔습니다.

문제는 이 이야기가 사료의 검증을 전혀 통과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시간 단위로 따라가 보면 전설의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먼저 워털루의 소식이 실제로 어떻게 런던에 닿았는지부터 확인해 보겠습니다.

1815년 6월, 소식은 실제로 이렇게 런던에 닿았습니다

워털루 전투는 1815년 6월 18일 일요일 저녁에 승부가 갈렸습니다. 그런데 웰링턴은 곧바로 급보를 띄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작성한 공식 보고서가 브뤼셀을 떠난 것은 이튿날인 6월 19일 오후였고, 그것을 품고 달린 사람은 헨리 퍼시 소령이었습니다.

퍼시의 여정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비에 젖은 진창길을 달렸고, 해협에서는 바람이 멎어 배가 멈춰 섰습니다. 결국 그는 배를 버리고 작은 보트로 옮겨 타 20마일 남짓을 노 저어 21일 늦은 아침 켄트의 브로드스테어스에 닿았습니다. 그가 노획한 프랑스군 독수리 깃발을 창밖으로 내건 마차를 타고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건넌 것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였습니다. 그는 세인트제임스 광장의 무도회장에서 섭정 왕세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승리를 알렸습니다.

그사이 런던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월요일 신문은 벨기에에서 전투가 시작됐다고만 전했고, 화요일에는 실제로는 워털루 이틀 전의 결판나지 않은 교전을 승전으로 잘못 전한 오보가 나왔습니다. 수요일에는 패전 소문까지 돌았습니다. 요컨대 시장은 이미 여러 날 동안 소문에 따라 출렁이고 있었고, 누구 하나가 침묵으로 시세를 만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언론사 출신 연구자 브라이언 캐스카트는 이 며칠을 시간 단위로 복원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런던에서 승전 소식을 가장 먼저 퍼뜨린 사람은 도버에서 올라온 이른바 C씨라는 인물이었고, 그는 21일 아침에 그 소식을 공개적으로 알렸습니다.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알게 된 것은 같은 날 오후로 추정되며, 경로는 전장을 다녀온 전령이 아니라 헨트에서 온 편지 한 통이었습니다. 몇 시간 빨랐던 것은 맞지만, 혼자만 아는 정보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네이선은 실제로 무엇을 했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09년부터 금괴 거래를 사업의 축으로 삼았고, 1811년부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 싸우던 웰링턴 부대의 급여를 현지로 송금하는 일과 영국이 동맹국들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실어 나르는 일을 맡았습니다. 여기서 국채라는 말이 나오는데, 국채는 정부가 돈을 빌리며 발행하는 빚 증서입니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정부는 국채를 더 찍고, 군대에 보낼 금은 더 필요해집니다.

역사학자 니얼 퍼거슨이 가문의 문서를 검토한 결과는 전설과 정반대였습니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전쟁이 한동안 더 이어질 것으로 보고 막대한 양의 금을 사 모아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그 금의 수요가 사라졌습니다. 워털루 직후의 로스차일드는 승전 소식에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로스차일드 아카이브의 정리에 따르면 그가 21일 오후에 주식과 국채를 사들였고 다음 날 되팔았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룻밤 수익으로는 훌륭한 거래였지만, 같은 주에 다른 투자자들이 올린 수익과 비교해 특별히 도드라지는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실제로 큰돈을 번 것은 그 뒤 몇 해에 걸쳐 영국 국채로 방향을 틀어 밀고 나간 판단, 그리고 환거래와 정부 금융에서 받은 수수료를 통해서였습니다. 하룻밤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시세를 조작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어느 신문도 그런 조작을 보도한 적이 없고, 형제들과 주고받은 방대한 서신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전투 직후 영국 정부가 그에게 작위를 제안했다는 사실 역시 그가 손가락질받을 일을 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1836년 세상을 떠날 때 그의 개인 순자산은 영국 국민소득의 0.62퍼센트 수준으로 추산됩니다. 대단한 부자였던 것은 맞지만, 그 부는 워털루의 하룻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의 출생지, 1846년 파리

그렇다면 전설은 언제 태어났을까요. 1846년 파리에서 사탄이라는 필명으로 팸플릿 한 권이 나왔습니다. 실제 저자는 조르주 다른벨이라는 인물이었고, 제목은 로스차일드 1세, 유대인의 왕에 관한 교훈적이고 진기한 역사였습니다. 제목만 보아도 이 글이 무엇을 노렸는지는 분명합니다.

전장을 직접 목격했다는 장면, 어부를 매수해 해협을 건넜다는 장면, 일부러 팔아 시세를 무너뜨렸다는 장면, 그리고 2천만 프랑이라는 숫자가 모두 이 팸플릿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워털루가 끝난 1815년부터 1846년까지 31년 동안, 유럽의 어느 신문도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없었습니다.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한참 뒤에 만들어진 창작이라는 뜻입니다.

시대 배경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1840년대 프랑스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채와 철도 사업의 큰손이었습니다. 1845년에 가문이 참여한 컨소시엄이 파리와 릴을 잇는 북부철도 면허를 받았고, 이듬해 7월 8일 팜푸에서 열차 탈선 사고가 나 14명이 숨지고 40여 명이 다쳤습니다. 원인이 규명되기도 전에 일부 신문은 이것이 로스차일드의 사업이라는 점을 앞세워 분노를 쏟아 냈습니다. 다른벨의 팸플릿은 바로 그런 공기 속에서 나와 유럽 각지의 인쇄소에서 찍혀 나갔습니다.

반박은 한참 늦었습니다. 1911년에 나온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판본에도 이 이야기가 사실처럼 실렸습니다. 권위 있는 매체에 한 번 실리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아무도 출처를 묻지 않습니다. 전설이 백과사전을 거쳐 상식이 되는 과정이 바로 여기서 일어났습니다.

왜 이 이야기는 죽지 않았는가

1940년 7월 17일, 독일에서 로스차일드가라는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에리히 바슈네크가 감독했고, 선전상 괴벨스의 지시로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극중에는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워털루에 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려 런던 시세를 끌어내린 뒤 싸게 사들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1941년 국제 배급을 위해 재편집됐을 때의 제목은 워털루에 건 로스차일드의 주식이었습니다. 파리의 팸플릿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한 세기 만에 국가 선전물의 뼈대가 된 것입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야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떠도는 국제 금융 배후설의 상당수가 이 워털루 장면을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 세계관에서 워털루는 일종의 창세기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재미있는 일화로 가볍게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습니다.

전설이 오래 사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야기의 모양입니다. 한 사람, 하룻밤, 한 번의 결정, 그리고 거대한 보상이라는 구조는 머리에 박히지만, 몇 해에 걸친 환거래와 수수료와 국채 포지션 이야기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대개 지루하고, 지루한 이야기는 잘 퍼지지 않습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그런 설명을 원한다는 점입니다. 시장이 이해할 수 없게 움직일 때, 누군가 다 알고 조종하고 있다는 설명은 아무도 모른다는 설명보다 견디기 쉽습니다. 게다가 이런 이야기는 반박하기가 무척 까다롭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사실 자체가 은폐의 증거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첫째, 이야기의 나이를 물어야 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그 이야기가 처음 기록된 시점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의심할 이유가 커집니다. 워털루 이야기에는 31년의 공백이 있었고, 그 공백을 메운 것은 목격자가 아니라 필명을 쓴 저자였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일수록 처음 누가 어디에 썼는지를 확인하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야기의 목적을 물어야 합니다. 어떤 글이 특정 민족이나 집단, 특정 가문을 지목하면서 부의 원인을 단 하나로 설명할 때, 그 글은 대체로 설명이 아니라 표적을 만드는 글입니다. 다른벨의 팸플릿이 그랬고, 1940년의 영화가 그랬습니다. 재미있는 금융 일화처럼 보이는 글에도 그런 성분이 섞여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셋째, 숫자의 출처를 물어야 합니다. 2천만 프랑처럼 딱 떨어지고 인상적인 숫자일수록 어느 장부, 어느 거래 기록에서 나온 것인지 따져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같은 숫자가 백 군데에 인용됐다는 사실은 검증이 아닙니다. 인용의 횟수와 근거의 무게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실제 기록이 알려 주는 것은 오히려 밋밋합니다. 몇 시간 빠른 소식보다, 여러 해에 걸쳐 방향을 정하고 버틴 판단과 정부 금융이라는 지루한 사업이 결과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크게 벌었다는 이야기가 짧고 극적일수록, 우리는 더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옮기는 이야기가 누군가에 대한 편견을 함께 실어 나르고 있지는 않은지도 같이 살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