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에서 두 배가 된 엔화
2026-09-07 · 6분 읽기
1985년 미국의 무역적자는 1,243억 달러였습니다. 사상 최대였고, 그중 일본을 상대로 낸 적자만 435억 달러로 1년 만에 65억 달러가 더 늘어났습니다. 미국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3.5퍼센트에 달했습니다. 원인을 하나로 꼽기는 어렵지만, 가장 눈에 보이는 범인은 환율이었습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달러는 엔화, 서독 마르크, 프랑스 프랑, 영국 파운드에 대해 약 50퍼센트나 올랐고, 1985년 2월 정점을 찍었습니다.
달러가 비싸다는 것은 미국 물건의 가격표가 해외에서 비싸게 보인다는 뜻이고, 동시에 일본 물건이 미국에서 싸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미국 공장과 농장은 수출길이 좁아졌고, 의회에서는 수입을 막자는 법안이 쏟아졌습니다. 포괄 통상법안 작업이 시작되면서, 백악관은 의회가 본격적인 보호무역 체제를 만들어버릴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 재무부가 선택한 길은 관세가 아니라 환율이었습니다. 수입을 막는 법을 만드는 대신, 주요국과 손잡고 달러값을 직접 끌어내리기로 한 것입니다. 1985년 9월 22일 일요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다섯 나라가 그 합의에 도달합니다. 환율이 시장이 알아서 정하는 가격이 아니라 회의실에서 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비밀로 준비된 일요일
플라자 호텔 회의는 그날 즉흥적으로 성사된 것이 아닙니다. 다섯 나라 재무부의 차관급 실무자들이 1985년 7월부터 9월 초까지 물밑에서 조건을 맞췄습니다. 당시 협상에 참여한 미국 재무부 관계자는 이 과정을 세계 최고의 비밀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미국 정부 안에서도 알아야 할 극소수에게만 정보가 공유됐습니다. 환율을 움직이려는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면 시장이 먼저 반응해버려 합의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입니다.
날짜 선택도 치밀했습니다. 유엔 총회 시즌에 맞춰 각국 고위 인사들이 뉴욕에 모여 있는 시점이었고,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연차총회보다 앞선 때였습니다. 재무장관들이 뉴욕에 와 있는 것 자체가 전혀 이상하지 않은 주말을 고른 것입니다. 발표는 시장이 닫혀 있는 일요일에 나와, 각국이 월요일 개장에 맞춰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확보했습니다.
모인 다섯 사람은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 일본 대장상 다케시타 노보루, 서독 재무장관 게르하르트 슈톨텐베르크, 프랑스 재무장관 피에르 베레고부아, 영국 재무장관 나이절 로슨이었습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를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 총재들도 함께였습니다. 합의 내용의 핵심은 간단했습니다. 달러가 아닌 통화들의 가치가 질서 있게 올라가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 각국이 외환시장에 함께 개입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흔히 오해되는 지점이 하나 있습니다. 일본이 강대국의 압력에 떠밀려 억지로 끌려 나왔다는 설명이 널리 퍼져 있지만, 당시 연구와 관계자 회고를 보면 일본은 상당히 적극적인 참여자였습니다. 미국 의회가 수입을 직접 막는 법을 만들어버리면 일본 수출 산업은 환율보다 훨씬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관세 장벽이 세워지는 것보다 엔화가 좀 오르는 쪽이 낫다는 계산이 일본 정부 안에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좀 오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실제 개입 규모였습니다. 각국은 시장에 투입할 자금의 분담까지 미리 정해뒀지만, 합의 이후 몇 주 동안 실제로 동원된 금액은 준비해둔 것의 일부에 그쳤습니다. 다섯 나라가 같은 방향으로 가겠다고 공개 선언한 것만으로 시장이 알아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환율을 움직이는 데 돈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에 대한 확신이라는 점을 보여준 장면입니다.
두 배가 된 엔화
효과는 즉각적이고 거칠었습니다. 1985년 9월 1달러에 약 237엔이던 환율은 1986년 평균 165엔으로 내려갔고, 1987년 2월에는 153엔, 그해 말에는 128엔까지 떨어졌습니다. 달러로 보면 2년 남짓 만에 정점 대비 40퍼센트 가까이 빠진 것이고, 엔화로 보면 가치가 거의 두 배가 된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엔고라고 불렀습니다.
수출로 먹고살던 일본 기업에는 재앙에 가까운 변화였습니다. 어제까지 미국에서 1만 달러에 팔던 자동차의 원가 구조가 하루아침에 흔들렸습니다. 일본 안의 생산비는 그대로인데 달러로 받는 돈을 엔으로 바꾸면 절반 가까이 줄어드는 상황이었으니, 값을 올리면 안 팔리고 값을 그대로 두면 남는 것이 없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1986년 일본 경제는 엔고 불황이라는 말이 일상어가 될 정도로 수출 경기가 식었습니다.
달러가 너무 많이, 너무 빨리 떨어지자 이번에는 반대 방향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주요국은 1987년 2월 22일 파리에서 다시 모여 달러의 하락을 멈춰 세우자는 데 합의했습니다. 루브르 합의입니다. 불과 17개월 사이에 같은 나라들이 달러를 내리기로 합의했다가 다시 떠받치기로 합의한 것입니다. 환율을 정책으로 조정하는 일이 생각만큼 정밀하지 않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이 먼저 인정한 셈입니다.
값싼 돈은 공장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의 대응은 금리 인하였습니다. 기준이 되는 공정 할인율은 1986년 1월 30일 5.0퍼센트에서 4.5퍼센트로 내려간 뒤, 3월 10일 4.0퍼센트, 4월 21일 3.5퍼센트, 11월 1일 3.0퍼센트를 거쳐 1987년 2월 23일 2.5퍼센트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떨어졌습니다. 1년 조금 넘는 기간에 금리를 반으로 깎은 것입니다. 수출이 막혔으니 내수와 투자로 성장을 떠받치자는 논리였고, 그 자체로는 교과서적인 처방이었습니다.
문제는 싸게 풀린 돈이 어디로 갔느냐입니다. 엔화가 비싸진 탓에 일본 안에 새 공장을 짓는 것은 매력이 떨어졌고, 기업들은 생산 기지를 해외로 옮기는 쪽을 택했습니다. 국내에 남은 값싼 자금은 땅과 주식으로 흘러갔습니다. 기업들이 본업보다 금융과 부동산 투자로 더 큰 이익을 내는 일이 흔해져, 일본에서는 재무 기술로 돈을 번다는 뜻의 자이테쿠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숫자로 보면 이렇습니다. 1985년과 1991년을 비교할 때 도쿄를 비롯한 6대 도시의 상업용지 가격은 302.9퍼센트, 주거용지는 180.5퍼센트 올랐습니다. 땅값이 세 배, 네 배가 되는 동안 닛케이지수는 1989년 12월 29일 3만8,915.87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1.15제곱킬로미터 넓이의 도쿄 황궁 부지 땅값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 부동산 가치보다 비싸다는 비유가 돌았습니다. 검증하기 어려운 비유지만, 사람들이 그 말을 과장으로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 당시 분위기를 말해줍니다.
은행들은 부풀어 오른 땅을 담보로 잡고 거침없이 돈을 빌려줬습니다. 담보 가치가 오르니 대출 한도가 늘고, 늘어난 대출이 다시 땅값을 밀어 올리는 순환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순환이 돌아가는 동안에는 모두가 돈을 벌고 있었고, 위험을 말하는 사람은 겁이 많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브레이크를 밟은 순간
일본은행은 결국 방향을 돌렸습니다. 1989년 5월 30일 공정 할인율을 2.5퍼센트에서 3.25퍼센트로 올린 뒤, 10월 11일 3.75퍼센트, 12월 25일 4.25퍼센트, 1990년 3월 20일 5.25퍼센트, 8월 30일 6.0퍼센트까지 1년 3개월 사이에 네 배 가까이 끌어올렸습니다. 내려가는 데 1년, 올라가는 데 1년 3개월이었습니다. 너무 늦게, 너무 급하게 밟힌 브레이크였습니다.
주식시장이 먼저 무너졌습니다. 1989년 12월 29일 최고치를 찍은 닛케이지수는 1990년 12월 5일 2만1,902포인트까지 내려앉아,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43퍼센트 넘게 빠졌습니다. 1992년 8월에는 1만4,338포인트까지 떨어졌습니다. 땅값도 뒤를 따랐고, 특히 가격이 가장 많이 올랐던 6대 도시의 하락 폭이 가장 깊었습니다.
담보 가치가 무너지자 은행이 들고 있던 대출은 돌려받기 어려운 돈으로 바뀌었습니다. 부실을 그 자리에서 털어내면 은행이 버티지 못할 규모였기 때문에, 많은 금융기관이 손실을 장부에 미루고 부실 기업에 추가 대출을 내주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살아 있지도 죽지도 않은 기업과 은행이 자원을 붙잡고 있는 상태가 1990년대 내내 이어졌습니다. 처음에 잃어버린 10년으로 불린 정체기는 디플레이션이 굳어지면서 잃어버린 20년, 다시 30년으로 이름이 계속 늘어났습니다.
닛케이지수가 1989년의 고점을 다시 넘어선 것은 2024년 2월 22일이었습니다. 종가 3만9,098.68포인트. 34년 2개월이 걸린 회복입니다. 그사이 2009년 3월에는 7,054.98포인트까지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거품이 남긴 가장 비싼 비용은 떨어진 금액이 아니라,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데 쓰인 시간이었습니다.
정말 플라자 합의 탓이었을까
플라자 합의가 일본의 30년을 망쳤다는 설명은 널리 퍼져 있지만,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만큼 단순하지 않다는 반론이 꽤 강합니다. 제프리 프랭클은 시간표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자산 가격이 가장 격렬하게 치솟은 시기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인데, 엔화 절상은 그보다 앞서 이미 멈춰 있었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끝난 뒤에 결과가 가장 커지는 설명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리처드 베르너는 외부 압력만으로 일본은행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고 봅니다. 금리를 2.5퍼센트까지 내리고 그 상태를 2년 넘게 유지한 것, 그리고 부동산으로 흘러드는 신용을 방치한 것은 일본 내부의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 비교 사례도 있습니다. 서독 마르크도 같은 합의로 크게 올랐지만 서독에서는 일본과 같은 자산 거품과 장기 침체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충격을 받고도 결과가 달랐다면, 결정적인 변수는 충격이 아니라 대응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이 지금도 자주 불려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이 특정 나라와의 무역적자를 문제 삼고 그 나라 통화가 저평가돼 있다고 주장하는 구도는 1985년 이후에도 반복됐습니다. 그런 국면이 올 때마다 다시 한번 플라자 합의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일본이 그 뒤에 어떤 30년을 보냈는지 보라는 반론이 함께 나옵니다. 한쪽에는 성공한 환율 조정의 사례가, 다른 쪽에는 그 뒤처리의 기록이 남아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정직한 요약은 이렇게 됩니다. 플라자 합의는 무대를 바꿨습니다. 수출로 성장하던 나라에 환율이라는 외생 충격이 들이닥쳤고, 그것은 분명 일본이 선택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금리를 얼마나 내리고 얼마나 오래 유지하며 어디로 흘러가는 신용을 내버려 둘지는 일본이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사건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언제나 이런 선택의 구간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플라자 합의가 남긴 첫 번째 사실은 환율이 날씨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1971년 미국이 금 창구를 닫은 뒤 환율은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이 됐지만, 그 시장 가격조차 몇 나라 재무장관이 주말 하루에 방향을 틀 수 있습니다. 환율 전망을 수요와 공급만으로 세우는 분석이 자주 어긋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격 뒤에는 그 가격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정치적 의지가 있고, 그 의지는 통계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처방의 크기와 기간에 관한 것입니다. 수출이 식었을 때 금리를 내리는 것은 이상한 결정이 아닙니다. 문제가 된 것은 내렸다는 사실이 아니라, 경기가 이미 돌아선 뒤에도 같은 상태를 오래 유지했다는 점입니다. 처방이 효과를 낸 다음에도 약을 끊지 못하면 부작용이 본래의 병보다 커질 수 있습니다. 이 구간은 지나고 나서야 선명해지고, 지나는 동안에는 대개 호황으로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거품의 한가운데에서는 그것이 거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도쿄의 땅값이 네 배가 되고 주가가 세 배가 되던 시기에 일본 사람들은 특별히 어리석지 않았습니다. 담보 가치가 오르니 대출이 늘고, 대출이 늘어 자산 가격이 더 오르는 순환은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논리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자산 가격이 오르는 이유를 설명할 때 그 설명이 가격 상승 자체에 기대고 있지 않은지 한 번쯤 되짚어 보는 습관이, 34년이라는 숫자가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값싼 교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