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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창구가 닫힌 일요일 밤 9시

1971년 8월 11일, 영국 측에서 미국 재무부에 한 가지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보유한 달러 중 30억 달러어치를 금으로 바꿔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규칙대로라면 거절할 수 없는 요청이었습니다. 미국은 27년 전 금 1온스를 35달러에 언제든 바꿔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 위에 세계 무역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요청을 들어주고 나면 다음 나라가 줄을 설 것이고, 미국 금고에는 줄 선 모든 나라에게 내줄 만큼의 금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숫자는 이미 오래전에 뒤집혀 있었습니다. 1970년이 되자 미국의 금 보유량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대외 채무의 22퍼센트 수준으로 내려앉았습니다. 1960년대 중반만 해도 55퍼센트였던 수치입니다. 1971년 상반기에만 220억 달러 규모의 자금이 미국을 빠져나갔고, 같은 해 미국은 1888년 이후 처음으로 상품 무역에서 적자를 냈습니다. 금액 자체는 22억 6천만 달러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크지 않지만, 100년 가까이 계속되던 흑자 기조가 끊어졌다는 신호의 무게는 달랐습니다.

1944년 브레튼우즈에서 설계된 체제의 1층은 달러에 환율을 고정한 각국이었고, 2층은 금과 달러를 연결한 미국의 약속이었습니다. 1971년 8월, 그 2층이 무너집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몇 년에 걸친 공개 토론이 아니라, 주말 사흘간 산장에 모인 열다섯 명 남짓이 외부와 단절된 채 내렸습니다.

금이 새어나가던 10년

압박은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프랑스는 1960년대 중반부터 이 약속의 허점을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습니다. 샤를 드골 대통령은 1965년 기자회견에서 국제 통화 체제의 기준은 달러가 아니라 금이어야 한다고 못 박았습니다. 한 나라가 자기 돈을 찍어 다른 나라의 자산을 사들일 수 있는 구조가 공정하지 않다는 논리였고, 프랑스는 실제로 보유한 달러를 금으로 바꿔가며 그 논리를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은 금값이 공식 가격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공동 방어선을 만들었습니다. 1961년 11월 1일 여덟 개 정부가 참여해 만든 런던 금 풀입니다. 시장에서 금값이 오르려 하면 각국이 보유한 금을 함께 팔아 가격을 눌러놓는 방식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금을 내놓는 쪽은 결국 금을 잃습니다. 1968년 3월 중순 런던 시장에서 달러를 금으로 바꾸려는 쇄도가 터지면서 금 풀은 해체됐고, 그 뒤로 중앙은행끼리 쓰는 공식 가격과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이 따로 움직이는 이중 구조가 됐습니다.

금이 새어나가는 동안 미국은 돈을 더 쓰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전 전비와 대규모 복지 확대가 겹치면서 정부 지출이 늘었고, 거기서 비롯된 인플레이션은 미국 물건을 상대적으로 비싸게 만들어 수입을 늘렸습니다. 즉 한편으로는 금을 지켜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돈을 계속 풀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1959년에 로버트 트리핀이 지적했던 구조적 모순이 재정과 전쟁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청구서가 되어 돌아온 것입니다.

1971년 여름이 되자 시장은 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달러를 금이나 다른 통화로 바꾸려는 흐름이 거세졌고, 유럽 중앙은행들은 밀려드는 달러를 받아내느라 곤욕을 치렀습니다. 영국의 30억 달러 요청은 그 흐름의 시작이 아니라, 미국 쪽에서 더는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게 만든 마지막 숫자였습니다.

외부와 끊긴 캠프데이비드의 48시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8월 12일 오후 재무장관 존 코널리와 만나 새 경제정책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이튿날 핵심 인물들을 대통령 별장 캠프데이비드로 불렀습니다. 첫 회의는 8월 13일 오후 3시 15분에 시작해 저녁 7시까지 이어졌고, 논의는 8월 15일 오전 11시 30분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됐습니다. 참석자는 코널리, 연방준비제도 의장 아서 번스, 재무부의 폴 볼커, 예산 책임자 조지 슐츠, 경제자문위원회의 폴 매크래컨과 허버트 스타인, 상무 쪽의 피터 피터슨, 비서실의 홀더먼과 얼릭먼, 연설문을 쓸 윌리엄 새파이어 등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것은 그 자리에 없던 사람들입니다. 국무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는 회의가 시작될 때까지 그런 모임이 열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의 환율이 걸린 결정인데도 외교 라인은 통째로 빠져 있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외부 연락을 차단한 채 주말을 보냈고, 정보가 새어나가면 시장이 먼저 반응해 손쓸 수 없게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산장 안에서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중앙은행 수장인 아서 번스는 금 창구를 닫지 말자고 버텼습니다. 27년을 지켜온 약속을 한쪽이 일방적으로 깨면 달러의 신뢰 자체가 회복 불가능하게 손상될 수 있다는 걱정이었습니다. 반대쪽에서 코널리는 지금 닫지 않으면 금고가 비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맞섰습니다. 결정은 코널리 쪽으로 기울었고, 번스는 자기 입장을 끝까지 말했지만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주말이 끝날 무렵 세 가지가 정리됐습니다.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창구를 닫는다. 치솟는 물가를 잡기 위해 임금과 물가를 법으로 동결한다. 그리고 수입품에 추가 관세를 매겨 무역 적자를 줄인다. 하나만으로도 큰 뉴스인 조치 세 개를 한꺼번에 묶은 것은 계산된 선택이었습니다. 가장 아픈 소식 하나만 내보내는 대신, 국민 모두에게 돌아갈 부담과 국내 경기를 살리는 조치를 함께 발표해 전체를 하나의 패키지로 보이게 만든 것입니다.

일요일 밤 9시, 정규 방송이 멈췄습니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9시, 백악관 집무실에서 닉슨은 예고 없이 전국 방송에 등장했습니다. 일요일 저녁 9시는 미국 가정이 인기 서부극 보난자를 보려고 TV 앞에 앉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대의 정규 편성이 중단되고 대통령이 나타났으니, 많은 시청자에게는 무슨 일이 터졌나 싶은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연설 제목은 평화의 과제였고, 내용은 통화 질서의 전환이었습니다.

핵심 문장은 짧았습니다. 그는 달러를 금이나 다른 준비자산으로 바꿔주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고 말했습니다.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영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어 전국의 모든 임금과 물가를 90일간 동결한다고 했고, 미국으로 수입되는 물품에 10퍼센트의 추가 세금을 매긴다고 했습니다. 동결을 집행할 기구로 생활비위원회를 만들고, 기업 설비 투자에는 10퍼센트의 세액 공제를 1년간 주겠다는 당근도 함께 내놓았습니다.

연설의 수사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그는 국제 환투기 세력이 위기를 먹고 살며 위기를 만드는 데 거들기까지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이 지키지 못하게 된 약속을 외부의 투기 세력 탓으로 돌리는 구도를 만든 것입니다. 동시에 한 나라 통화의 힘은 그 나라 경제의 힘에서 나온다는 말로, 금이라는 담보가 없어도 달러는 괜찮다는 논리를 세웠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이 말이 맞았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도 그것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박수가 먼저, 혼란은 그다음

국내 반응은 뜻밖에도 환호였습니다. 다음 날인 8월 16일 뉴욕 증시에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3포인트 올랐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역대 하루 최대 상승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대통령이 보여준 과감함에 주저 없이 박수를 보낸다는 사설을 실었습니다. 무역 적자와 물가에 지쳐 있던 미국 대중에게 이 발표는 약속을 깬 사건이 아니라 드디어 뭔가를 한 사건으로 읽혔습니다.

국경 바깥의 사정은 달랐습니다. 환율의 기준선이 사라졌으니 각국 외환시장은 가격을 매길 근거를 잃었고,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기로 계약해둔 기업들은 그 돈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게 됐습니다. 수입품에 붙은 10퍼센트 추가 관세는 특히 일본과 서독처럼 미국 시장에 의존하던 나라들에 직접적인 타격이었습니다. 미국이 약속을 깼는데 혼란을 수습해야 하는 쪽은 나머지 세계였습니다.

이 비대칭을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한 말이 그해 말 로마에서 열린 선진 10개국 재무장관 회의에서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코널리가 당황한 유럽 측 상대들에게 달러는 우리 통화지만 그것은 당신들의 문제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 발언이 정확히 언제 어떤 자리에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리고, 코널리 본인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다만 출처가 다투어지면서도 반세기 동안 계속 인용된다는 사실 자체가, 그 말이 당시의 구도를 얼마나 정확히 찍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봉합 시도도 있었습니다. 각국은 1971년 12월 18일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에 모여 환율표를 다시 그렸습니다. 금 가격을 1온스 35달러에서 38달러로 올려 달러 가치를 약 7.9퍼센트 낮추고, 각국 통화의 변동 허용 범위를 위아래 1퍼센트에서 2.25퍼센트로 넓히는 절충안이었습니다. 금태환은 복원되지 않았으므로, 고정환율의 형식만 남기고 토대는 비워둔 합의였습니다.

임금과 물가를 묶어본 2년 반

세 가지 조치 중 미국인의 일상에 가장 직접 닿은 것은 금태환 정지가 아니라 임금과 물가 동결이었습니다. 처음 90일은 성적이 괜찮았습니다. 동결 기간 중 물가 상승률은 연 4퍼센트 수준으로 내려앉았고, 정부는 정책이 통했다고 판단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동결이 풀리고 가이드라인 방식으로 바뀐 이후 약 1년 반 동안, 물가 상승률은 5퍼센트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가격의 상한을 법으로 정해두면 가격표는 멈추지만 수요와 공급은 멈추지 않습니다. 팔아서 남는 것이 없어진 생산자는 물량을 줄이거나 시장에서 빠졌고, 그 결과는 품귀 현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소비자들은 가격이 묶인 대신 물건이 없는 상황을 겪으며 정책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부는 1973년 6월 다시 한 번 동결 카드를 꺼냈지만 같은 문제가 반복됐습니다.

통제 장치는 1974년 4월에 폐지됐습니다. 그리고 닉슨이 사임한 1974년 8월 무렵 미국의 물가 상승률은 12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가격을 억누른 2년 반 동안 물가를 밀어 올리던 힘은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있었고, 뚜껑을 열자 그만큼 더 세게 튀어 올랐습니다. 가격은 질병이 아니라 증상이었다는 점을 비싼 수업료로 확인한 셈입니다.

닻을 잃은 돈, 그래도 중심에 남은 달러

스미스소니언 합의는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1973년 2월 14일 미국은 달러 가치를 10퍼센트 더 낮춘다고 발표했고, 그 직후 일본을 비롯한 주요국들이 환율을 시장에 맡기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1973년 3월이 되자 주요 통화는 사실상 모두 변동환율제로 넘어갔습니다. 환율이 정부가 정해주는 숫자가 아니라 매일 시장에서 매겨지는 가격이 된 것인데, 지금 우리가 아침마다 원달러 환율을 확인하는 세상은 이때 시작됐습니다.

이로써 세계의 모든 주요 통화는 금이나 다른 실물자산에 묶이지 않고, 그 돈을 발행한 정부와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만으로 가치를 갖게 됐습니다. 이런 돈을 불환지폐라고 부릅니다. 바꿔 말하면 중앙은행이 돈을 얼마나 찍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물리적 한도가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1970년대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그리고 그 뒤 반세기 동안 반복된 통화정책 논쟁의 뿌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역설적인 것은 담보를 잃은 달러가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1974년 이후 미국과 산유국들 사이의 협력이 자리를 잡으면서 원유 거래가 달러로 이뤄지는 관행이 굳어졌고, 세계는 무역을 하려면 여전히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각국 중앙은행은 금 대신 미국 국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금이라는 닻이 빠진 자리를 미국 경제의 규모와 미국 국채 시장의 깊이가 대신 메운 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닉슨 쇼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속도입니다. 27년 동안 세계 무역의 기준이던 약속이 주말 사흘의 비공개 회의와 몇 분짜리 TV 연설로 사라졌습니다. 사전 협의도, 유예 기간도, 외교 통보도 없었습니다. 시장이 전제로 삼고 있는 규칙이 반드시 시장의 속도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규칙은 하룻밤에 바뀌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모두에게 똑같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공식 설명과 실제의 거리입니다. 발표문에는 일시적이라는 단어가 분명히 들어 있었지만 금 창구는 다시 열리지 않았습니다. 90일만 하겠다던 가격 통제는 2년 반을 끌었고, 효과는 뒤집혔습니다. 정책 발표의 문구를 읽을 때 그것이 무엇을 약속하는지보다,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조건이 실제로 갖춰져 있는지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합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조금 무거운 사실입니다. 1971년 8월 이후 우리가 쓰는 돈의 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금이 아니라 제도와 신뢰뿐입니다. 신뢰는 무너지기 전까지는 아무 비용도 들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무너지는 순간에는 되돌릴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통화정책이나 환율 뉴스를 볼 때 숫자의 방향만 쫓기보다, 그 숫자를 받치고 있는 신뢰가 어떤 상태인지를 함께 보는 습관이 긴 투자에서는 훨씬 큰 차이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