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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을 받아가면 돈을 드립니다

2020년 4월 20일 뉴욕 시간 오후 2시 30분, 거래소 화면에 찍힌 숫자는 배럴당 마이너스 37.63달러였습니다. 앞에 붙은 마이너스는 오타가 아니었습니다. 원유 한 배럴을 받아가는 사람에게 오히려 37.63달러를 얹어주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날 하루 만에 가격은 55.90달러가 빠졌고, 장중 한때는 마이너스 40.32달러까지 내려갔습니다.

석유는 산업혁명 이후 가장 값나가는 원자재였습니다. 전쟁의 이유가 되고 여러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그 검은 액체가, 하루아침에 돈을 주고 치워야 하는 짐이 된 것입니다. 미국 원유 선물 시장이 문을 연 1983년 이후 37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습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뒷날 보고서에서 그날의 속도와 크기를 두고 이례적이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크게 다친 쪽은 정유회사도, 산유국도 아니었습니다. 기름값이 이렇게까지 싸졌으니 언젠가는 오르지 않겠느냐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으로 원유 관련 상품을 사 모은 한국과 중국과 미국의 개인투자자들이었습니다. 왜 그 상식이 배신을 당했는지 이해하려면, 뉴스에 나오는 국제 유가라는 숫자가 실제로는 무엇의 가격인지부터 봐야 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국제 유가는 기름값이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듣는 국제 유가는 주유소에서 파는 기름의 값이 아니라, 선물 계약의 값입니다. 선물이란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물건을 정해진 값으로 주고받기로 지금 약속해두는 계약을 말합니다. 그날 마이너스가 된 것은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 흔히 WTI라고 부르는 원유의 5월 인수 계약이었습니다. 한 계약의 단위는 원유 1,000배럴입니다.

이 계약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조건이 하나 붙어 있습니다. 만기까지 계약을 들고 있으면 실제로 원유 1,000배럴을 받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받는 장소도 정해져 있습니다. 미국 오클라호마주 쿠싱이라는 작은 도시의 저장 탱크입니다. 종이 위의 숫자놀음처럼 보이지만, 만기의 끝에는 언제나 실물이 놓여 있는 계약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기름을 쓸 일이 없는 투자자들은 만기 전에 계약을 팔고 그다음 달 계약을 다시 사면서 포지션을 이어갑니다. 이 갈아타기를 롤오버라고 부릅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이 굴러가는 절차입니다. 만기 직전의 계약을 사겠다는 사람이 어딘가에는 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사겠다는 사람이 사라지는 순간에 생깁니다. 만기가 코앞인데 살 사람이 없으면, 기름을 받아올 준비가 안 된 투자자는 어떤 값에라도 계약을 넘겨야 합니다. 2020년 4월 20일에 일어난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살 사람이 사라진 이유는 시장 안이 아니라 시장 밖, 텅 빈 저장 탱크 쪽에 있었습니다.

수요가 통째로 사라진 봄

2020년 봄, 세계는 처음으로 동시에 멈춰 섰습니다. 비행기가 뜨지 않고 출근길이 사라지고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당시 코로나19와 경기 위축으로 사라진 원유 소비를 세계 소비의 약 30퍼센트, 하루 3,000만 배럴 수준으로 봤습니다. 인류가 기름을 쓰기 시작한 이후 이만한 수요가 이렇게 빨리 없어진 적은 없었습니다.

공급 쪽은 그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산유국 협의체인 OPEC플러스는 2020년 4월 12일 하루 970만 배럴을 줄이기로 합의했지만, 그 감산이 실제로 시작되는 날은 5월 1일이었습니다. 유정은 수도꼭지가 아닙니다. 한번 잠그면 다시 열 때 비용이 들고, 유정 자체가 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감산이 발효되기 전까지 기름은 계속 땅에서 올라왔습니다.

쓸 사람은 사라졌는데 나오는 양은 그대로라면, 남는 기름은 어딘가에 담아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해 봄 원유 저장은 갑자기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서비스가 됐습니다. 탱크가 모자라자 사람들은 바다 위의 유조선을 창고로 쓰기 시작했고, 유조선 임대료는 뛰어올랐습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기름값이 무너진 직접적인 이유는 기름이 쓸데없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기름을 둘 곳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물건 자체의 값이 아니라 물건을 받아둘 공간의 값이 가격을 결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쿠싱의 탱크가 꽉 찼습니다

앞에서 말한 인수 장소, 쿠싱의 저장 능력은 7,600만 배럴에 가깝습니다. 2020년 4월 중순이 되자 이곳은 사실상 가득 찼고, 남은 공간은 이미 전부 계약이 잡혀 있다는 이야기가 시장에 돌았습니다. 돈을 내겠다고 해도 빌릴 탱크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그전까지 그냥 계약서의 문구였던 실물 인수 의무가 갑자기 무서운 것이 됐습니다. 만기까지 5월물을 들고 있으면 원유 1,000배럴이 쿠싱으로 배달되는데, 그걸 부어둘 탱크가 없는 것입니다. 받아둘 곳이 없는 물건을 받게 되는 상황에서는, 돈을 얹어주고 남에게 떠넘기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됩니다. 마이너스 가격은 시장이 고장난 흔적이라기보다, 그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숫자였습니다.

흥미로운 건 이 가능성을 거래소가 미리 내다봤다는 점입니다. 시카고상품거래소 청산 부문은 4월 15일 회원사들에게 공지를 보내, 일부 에너지 선물이 0이나 마이너스 가격에서 거래될 수 있으며 그래도 거래와 청산 시스템은 정상 작동한다고 알렸습니다. 마이너스 가격을 넣어보고 시험할 수 있는 별도 환경도 열어줬습니다.

다시 말해 무대 장치는 닷새 전에 이미 다 깔려 있었습니다. 다만 그 공지를 읽은 사람은 대형 금융기관의 실무자들이었고, 스마트폰으로 원유 상품을 사 모으던 개인투자자들은 그런 문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 몇 시간

5월물의 만기는 4월 21일이었습니다. 4월 20일은 그 계약이 거래되는 사실상 마지막 날이었던 셈입니다. 상품선물거래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그날 오후 1시부터 정산이 이뤄지는 오후 2시 30분 사이의 가격 움직임이 특히 극단적이었습니다.

보고서는 5월물을 들고 있던 거래자 대부분이 4월 20일 전에 이미 정리하고 나갔다고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만기를 앞둔 미결제 계약은 평소보다 많이 남아 있었고, 호가창의 유동성은 얇아져 있었습니다. 나가야 하는 사람은 남아 있는데 받아줄 사람은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이런 시장에서는 가격이 수요와 공급을 반영하는 대신, 먼저 나가려는 사람의 다급함을 반영합니다.

같은 날 6월 인수 계약은 20.43달러였습니다. 똑같은 기름인데 만기가 한 달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60달러 가까이 차이가 났던 것입니다. 이 간격이야말로 마이너스 가격이 기름의 가치가 아니라 만기라는 조건의 문제였다는 증거입니다.

다음 날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4월 21일에는 6월물마저 11.57달러로 43퍼센트 내려앉았습니다. 5월물이 겪은 일이 한 달 뒤 반복될 수 있다는 공포가 옮겨간 것입니다. 마이너스라는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저장 공간이 없다는 사정이 시장 전체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숫자를 따라가던 상품들

개인투자자가 원유 선물을 직접 사고파는 일은 드뭅니다. 대신 유가를 따라가도록 설계된 상장 상품을 삽니다. 그중 ETN은 증권사가 특정 지표의 움직임을 따라가겠다고 약속하고 발행하는 증권입니다. 지표를 따라간다는 약속이지, 그 지표 자체를 쪼개서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해집니다.

한국에서도 그 봄에 원유 상품으로 돈이 몰렸습니다. 금융감독원이 2020년 4월 9일 원유 선물 ETN에 위험을 알린 뒤에도, 이어진 열 거래일 동안 개인투자자는 유가 상승에 베팅하는 상품을 1조 3,649억 원어치 순매수했습니다. 감독당국은 4월 23일 경고 대상을 WTI 선물 관련 상품 전반으로 넓혔습니다. 사려는 힘이 경고보다 셌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드러난 문제가 괴리율입니다. 상품이 따라가기로 한 지표의 값과, 시장에서 실제로 붙은 가격이 벌어진 정도를 말합니다. 4월에 국내 레버리지 WTI 선물 ETN의 괴리율은 최대 95퍼센트까지 벌어졌습니다. 한국거래소는 괴리율이 20퍼센트를 넘으면 단일가매매로 돌리고 30퍼센트를 넘으면 사흘간 거래를 정지시켰지만, 5월 5일 기준으로 어떤 상품은 괴리율이 500퍼센트를 넘긴 상태였습니다. 같은 기간 이 상품들의 가격은 한 달 평균 79퍼센트 넘게 떨어졌습니다.

이런 일은 한국만의 사정이 아니었습니다. 미국 최대 원유 상장 상품은 그 주에 자신이 담는 계약의 구성을 바꿔가며 버텼고, 중국에서는 은행이 판 원유 연계 상품의 고객들이 마이너스 정산을 그대로 뒤집어써 원금을 넘는 손실을 봤다는 논란이 크게 번졌습니다. 중국 감독당국은 그해 12월 해당 은행에 제재를 내렸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같은 구간에서 같은 방식으로 무너졌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사건이 남긴 첫 번째 교훈은 가격의 정체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세판에서 보는 숫자는 물건값이 아니라 계약의 값입니다. 계약에는 만기가 있고, 인수 의무가 있고, 그 의무를 이행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들을 모른 채 숫자만 보면, 숫자가 왜 그렇게 움직이는지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싸다는 판단의 근거입니다. 많은 사람이 그 봄에 기름값이 역사적으로 싸다고 생각했고, 그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원유 가격은 이후 몇 년에 걸쳐 회복됐습니다. 그런데 그때 상품을 들고 있던 사람들의 손실은 함께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방향을 맞혀도 손실이 남는 구조가 있다는 사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잔인한 부분입니다.

세 번째는 따라가는 상품과 따라가려는 대상은 다른 생물이라는 점입니다. 어떤 지표를 따라가겠다는 약속은, 시장이 정상일 때 지켜지기 쉽고 비정상일 때 지켜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상품을 가장 사고 싶어지는 순간은 대개 시장이 비정상인 순간입니다. 약속이 가장 흔들릴 때 가장 많이 사게 되는 구조입니다.

2020년 4월 20일의 마이너스 37.63달러는 시장이 미쳤던 날의 기록이 아닙니다. 계약서에 적혀 있던 조건들이 한꺼번에 눈에 보이게 된 날의 기록입니다. 무언가를 사기 전에 그것이 어떤 약속으로 만들어진 물건인지, 그 약속의 마지막 날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지를 한 번은 읽어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