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 프랑스의 돈을 다시 만든 도박사
2026-09-07 · 7분 읽기
1720년 7월 17일 파리 비비엔 거리에는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손에 든 지폐를 금화로 바꿔달라고 요구하러 왕립은행 앞에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군중이 한쪽으로 밀리면서 열다섯 명 안팎이 그 자리에서 깔려 숨졌습니다. 1년 반 전, 같은 도시의 사람들은 바로 그 은행이 찍어낸 종이를 금화보다 반가워했습니다.
이 종이를 설계한 사람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로입니다. 금융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이력이 이만큼 극적인 사람은 드뭅니다. 1694년 런던에서 결투로 상대를 죽여 사형을 선고받았고, 형이 벌금으로 감경되는 과정에서 감옥을 빠져나와 유럽 대륙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뒤 20년 가까이 도박으로 생계를 잇고 재산을 모으면서, 암스테르담과 베네치아의 은행 제도를 들여다보며 자기 이론을 다듬었습니다.
그가 기회를 잡은 것은 1715년입니다. 72년간 왕위에 있었던 루이 14세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것은 베르사유 궁전과, 20억 리브르를 넘는 국가 부채였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한 해 조세 수입으로 따지면 10년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다섯 살 루이 15세를 대신해 섭정을 맡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에게는 기댈 곳이 없었고, 바로 그 자리에 존 로가 서 있었습니다.
돈이 적은 게 아니라 돌지 않는 것이 문제다
존 로의 주장은 당시 상식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그때까지 한 나라의 부는 보유한 금과 은의 양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로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금속의 총량이 아니라 거래에 쓸 수 있는 돈이 얼마나 빠르게 도는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금화가 장롱에 들어가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믿을 수 있는 종이돈이 상인들 사이를 오가면 거래가 늘고 세금도 늘어난다는 논리입니다.
1716년 5월 로는 섭정의 허가를 받아 방크 제네랄이라는 은행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금화와 은화를 맡기면 그만큼의 지폐를 써주고, 지폐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속 화폐로 돌려주는 방식이었습니다. 금속을 직접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니 상인들에게는 훨씬 편했습니다. 결정적인 조치는 정부가 이 지폐로 세금을 받아주기 시작한 것입니다. 세금을 낼 수 있는 종이는 그 순간부터 모두가 받아주는 돈이 됩니다.
초기 성과는 분명했습니다. 지폐는 신뢰를 얻어 한때 같은 액면의 금속 화폐보다 높게 거래됐고, 거래가 늘면서 상업이 살아났습니다. 로가 뒤에 재정 책임자에 오른 뒤 2년 사이 프랑스의 산업 생산이 크게 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오늘날의 중앙은행과 지폐 제도를 300년 앞서 구현한 성공적인 실험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였습니다.
지폐와 주식이 한 몸이 된 구조
1717년 로는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 가지고 있던 광대한 영토 루이지애나의 개발 독점권을 받아 서부 회사를 세웠습니다. 흔히 미시시피 회사로 불리는 회사입니다. 그는 여기에 결정적인 장치를 하나 붙였습니다. 값이 많이 떨어져 있던 정부 채무 증서를 액면 그대로 받아주고 회사 주식으로 바꿔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거의 못 받게 된 돈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로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1718년 방크 제네랄은 정부가 사들여 왕립은행인 방크 루아이얄이 되었습니다. 1719년에는 동인도회사와 아프리카회사 등 프랑스의 해외 무역 독점권을 차례로 흡수해 인도회사로 통합했고, 세금 징수를 맡는 권리와 화폐를 주조하는 권한까지 가져왔습니다. 1720년 1월 5일 그는 재정총감 자리에 올랐고, 2월에는 은행과 회사가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여기서 이 사건의 성격이 결정됩니다. 돈을 찍는 기관과 주식을 발행하는 회사와 국가 재정이 한 사람 손에서 한 덩어리로 묶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은행이 찍은 지폐로 회사 주식을 샀고, 회사는 그 지폐로 국가 부채를 떠안았고, 주가가 흔들리면 은행은 지폐를 더 찍어 주식을 사들였습니다. 같은 해 영국에서 무너진 남해회사는 주식만 폭락했지만, 프랑스는 주식과 돈이 같은 밧줄에 매여 있었습니다. 한쪽이 떨어지면 다른 쪽도 함께 떨어지는 구조였습니다.
지폐 발행량이 어디까지 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로가 발행 한도로 6천만 리브르를 제시했을 때, 섭정은 10억 리브르를 찍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열 배가 아니라 열여섯 배가 넘는 규모입니다. 발행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쪽은 설계자였고, 제동을 풀어버린 쪽은 돈이 급한 정부였습니다. 이 순서는 기억해 둘 만합니다.
엘도라도라는 광고
주가를 끌어올리려면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파리 거리에는 루이지애나를 금과 은, 보석이 땅에 깔린 신천지로 묘사한 소책자가 뿌려졌습니다. 1718년 미시시피강 하류에 세운 새 거점에는 섭정의 이름을 붙여 누벨 오를레앙, 오늘날의 뉴올리언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지도와 삽화가 함께 돌면서 파리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실재하지 않는 도시의 풍경이 그려졌습니다.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루이지애나는 늪과 열병이 기다리는 미개척지였고, 자원하는 이주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회사는 설립 허가의 조건으로 정착민 6천 명과 노예 3천 명을 식민지로 보내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숫자를 맞추기 위해 1719년 9월부터 파리의 수형자와 부랑자를 배에 태워 보내는 일이 시작됐고, 이 방식은 반발이 커지면서 1720년 5월에 금지됐습니다.
이 대목은 거품 이야기에서 흔히 가볍게 지나가지만, 가장 많은 대가를 치른 쪽이 누구였는지를 보여줍니다. 파리에서 주가가 오르는 동안 배에 실려 간 사람들의 상당수는 도착한 땅에서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주가를 지탱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려 동원된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이 사건에서 가장 먼 거리였습니다.
캥캉포아 거리의 열두 달
주가 기록은 지금 봐도 비현실적입니다. 1719년 1월 500리브르에서 출발한 주식은 6월 17일 750리브르, 7월 21일 1,000리브르를 지났고, 7월 말에 2,000리브르, 8월 17일에 3,000리브르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10,000리브르에 닿았습니다. 열두 달 만에 스무 배입니다. 중간에 쉬어 가는 구간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 이 상승의 특징입니다.
거래는 파리 캥캉포아 거리의 노천 시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 너무 몰려 밟히는 사고가 잇따르자 당국은 이 거리에 말과 마차가 들어오는 것을 금지해야 했습니다. 하루 사이에 신분이 뒤바뀌는 일이 흔해지면서 백만 단위의 재산가를 가리키는 새 단어가 이 무렵 인쇄물에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1719년 10월과 1720년 6월의 파리 간행물에 백만장자를 뜻하는 프랑스어 표현이 실린 것이 지금까지 확인된 이른 사례입니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쓰는 단어 하나가 이 거리에서 만들어진 셈입니다.
이 거리를 무대로 한 일화도 많이 전해집니다. 투기꾼들이 자기 등에 계약서를 대고 서명하게 해준 덕에 큰돈을 벌었다는 꼽추, 주인의 주식을 팔러 나갔다가 그 사이 값이 뛰어 스스로 부자가 되어 일을 그만뒀다는 하인 이야기가 지금도 인용됩니다. 다만 이런 일화들은 당대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전설에 가깝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만한 분위기였다는 점만 사실로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상승을 떠받친 것은 인쇄기였습니다. 주가가 흔들릴 때마다 왕립은행은 지폐를 더 찍어 주식을 사들였고, 주주들에게 지폐를 빌려주어 주식을 더 사게 했습니다. 시중에 도는 돈은 빠르게 불어났습니다. 1720년 1월 파리의 물가 상승률은 한 달 사이 20퍼센트를 넘는 수준으로 치솟았습니다. 주가가 오르는 즐거움과 물가가 오르는 고통이 같은 인쇄기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지폐가 함께 무너진 순간
균열은 1720년 1월에 시작됐습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이 주식을 팔아 손에 쥔 지폐를 들고 은행으로 가서 금화로 바꾸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이가 금속으로 바뀌는 순간 로의 계산은 무너집니다. 금고에 있는 금속보다 발행한 지폐가 훨씬 많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개인이 일정액 이상의 금과 은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결제를 지폐로만 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신뢰를 명령으로 대체하려 한 시도였습니다.
1720년 5월 21일 로는 지폐와 주식의 가치를 단계적으로 낮추겠다는 결정을 발표했습니다. 질서 있게 거품을 빼겠다는 취지였지만, 사람들이 읽은 메시지는 하나였습니다. 정부가 스스로 이 종이의 값이 적힌 숫자만 못하다고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반발이 격해져 이 결정은 엿새 만에 철회됐고, 로는 5월 29일 재정총감에서 해임됐습니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안 된 7월 17일, 비비엔 거리의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뒷일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10,000리브르까지 올랐던 주가는 9월에 2,000리브르, 12월에 1,000리브르로 내려왔고, 1721년 9월에는 처음 출발했던 500리브르로 돌아갔습니다. 2년 반 동안의 상승이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에 선 것입니다. 지폐는 그보다 더 나빴습니다. 주식은 가격이 내려가도 종이로 남았지만, 사람들이 지폐로 받아두었던 재산은 교환 가치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로는 1720년 12월 22일 프랑스를 떠났습니다.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재산을 굴린다고 평가받던 사람이 거의 빈손으로 나갔습니다. 재산의 대부분이 자기가 만든 회사의 주식과 프랑스 안의 부동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브뤼셀과 베네치아를 떠돌며 다시 도박으로 생계를 잇다가 1729년 3월 21일 베네치아에서 숨졌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한 나라의 돈을 새로 만들었던 사람의 마지막은 그렇게 조용했습니다.
프랑스가 80년간 지폐를 멀리한 이유
이 사건이 남긴 가장 긴 흔적은 손실 금액이 아니라 거부감이었습니다. 프랑스 사회는 그 뒤 오랫동안 은행이라는 말 자체를 꺼렸고, 금융기관들은 이름에 방크라는 단어를 넣지 않으려 했습니다. 지폐가 프랑스 경제에 본격적으로 다시 들어오기까지는 80년 가까이 걸렸습니다. 1800년 방크 드 프랑스가 세워지기 전까지, 프랑스는 사실상 금속 화폐로 돌아간 나라였습니다.
주식 시장도 오래 위축됐습니다. 1724년 정부는 투기를 관리하겠다는 목적으로 파리 증권거래소를 공식 설치했는데, 그 규제의 일부는 대단히 길게 남았습니다. 미래의 가격을 미리 정해 거래하는 선물 방식의 거래는 1885년까지 금지된 상태였습니다. 사고 한 번이 160년짜리 금지 조항을 남긴 것입니다.
그동안 해협 건너 영국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같은 1720년에 남해회사로 똑같이 홍역을 치렀지만, 영란은행은 그대로 남았고 국채와 주식 시장도 계속 작동했습니다. 18세기 후반 두 나라가 자금을 끌어오는 능력에서 벌어진 차이는 전쟁의 승패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프랑스의 재정 압박은 끝내 풀리지 않아 루이 16세 시대의 위기로 이어졌고, 많은 연구자들은 이 긴 사슬이 1789년의 혁명으로 가는 조건의 일부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존 로의 이론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금속의 양이 아니라 신용이 경제를 움직인다는 생각, 중앙은행이 자산을 사들여 돈을 공급한다는 발상은 오늘날 거의 모든 나라가 쓰고 있는 방식입니다. 차이는 순서와 제동 장치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중앙은행은 정부와 분리되어 있고, 주식 가격을 떠받치기 위해 돈을 찍는 일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로의 실험은 그 두 가지 장치가 왜 필요한지를 가장 비싼 방법으로 증명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주가가 스무 배 올랐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주가를 떠받친 돈과 사람들이 생활에 쓰던 돈이 같은 돈이었다는 점입니다. 투자 자산이 무너질 때 생활이 함께 무너지는지 아닌지는 이 연결 고리에서 갈립니다. 지금도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해볼 수 있습니다. 내 자산의 가격이 반으로 줄었을 때, 그것이 손실로 끝나는가 아니면 생활비와 빚 상환까지 흔드는가입니다.
두 번째는 신뢰를 명령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금화 소지를 금지하고 지폐로만 결제하라고 강제한 조치는 사태를 가라앉히기는커녕 사람들의 의심을 확인해 주는 신호가 됐습니다. 가격을 억지로 떠받치는 조치가 나올 때 시장이 그것을 안심의 근거로 읽는지 위험의 증거로 읽는지는 300년 전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존 로는 사기꾼이 아니었다는 점을 짚어둘 만합니다. 그는 자기 이론을 진심으로 믿었고, 자기 재산도 끝까지 그 안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를 무너뜨린 것은 거짓이 아니라 멈출 수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주가가 흔들릴 때마다 지폐를 더 찍는 선택을 반복하는 동안, 되돌아갈 지점은 계속 멀어졌습니다. 확신을 가진 사람이 제동 장치 없이 일을 키우면 어떤 결말이 오는지, 이 사건은 300년째 같은 답을 내놓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