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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첫 최저임금법은 왜 남반구에서 나왔나

미국 워싱턴주 웨너치에 캐스케이디언이라는 호텔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객실 청소부로 일하던 엘시 패리시라는 여성이 일을 그만두면서 회사에 돈을 요구합니다. 주법이 정한 최저임금은 주 48시간에 14달러 50센트인데 자신은 그보다 적게 받았으니 차액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1933년 8월부터 1935년 5월까지 일한 몫으로 그가 청구한 금액은 216달러였습니다.

호텔 측은 거절했습니다. 거절할 근거도 있었습니다. 불과 열두 해 전 미국 연방대법원이 최저임금법을 위헌이라고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법이 있어도 그 법이 헌법에 어긋난다면 무효였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청소부의 소송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갑니다.

최저임금은 지금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서 마치 처음부터 있었던 제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제도의 나이는 이제 겨우 130년 남짓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조용했던 적이 없습니다.

땀을 쥐어짜는 가게

19세기 후반 영국과 미국의 의류 산업에는 독특한 하청 구조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큰 공장이 직접 옷을 만드는 대신 중간 업자에게 일감을 넘기고, 중간 업자는 다시 뒷골목의 작은 작업장이나 노동자의 집으로 일을 흩뿌렸습니다. 이런 작업장을 당시 사람들은 스웨트숍이라고 불렀습니다. 노동자의 땀을 쥐어짠다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스웨트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성과 아동, 그리고 갓 도착한 이민자였습니다. 이들에게는 노동조합이 없었고, 일감을 거절할 여유도 없었습니다. 옆집 사람이 더 싼 값에 같은 일을 받아 가면 그만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임을 깎아도 항의할 곳이 없는 구조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1880년대 후반 이 문제를 두고 대규모 조사를 벌입니다. 조사 과정에서 드러난 실상은 당시 사회를 상당히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문제는 해법이었습니다. 자선으로 해결하자는 쪽, 노동조합을 키우자는 쪽, 그리고 아예 법으로 임금의 바닥을 정하자는 쪽이 갈렸습니다.

마지막 주장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임금은 일하는 사람과 고용하는 사람이 알아서 정할 문제이고 국가가 끼어들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 주류 견해였기 때문입니다. 이 급진적인 생각이 처음으로 법이 된 곳은 유럽도 미국도 아니었습니다.

뉴질랜드와 빅토리아주의 실험

1894년 뉴질랜드가 산업조정중재법을 만듭니다. 노사 분쟁을 중재 기구에 맡기고 그 기구가 임금 수준까지 정할 수 있게 한 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는 형태의 최저임금 고시와는 생김새가 달랐지만, 국가 차원에서 임금의 하한을 강제할 통로를 처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초로 꼽힙니다.

2년 뒤인 1896년, 호주 빅토리아주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공장상점법을 고쳐 임금위원회를 만들고, 임금이 특히 낮다고 지목된 여섯 개 업종의 최저 임금을 정하게 한 것입니다. 애초에는 4년만 해 보는 한시적 실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실험의 결과는 지지를 얻었고, 1904년 이 제도는 상설화됩니다. 그 무렵에는 적용 업종이 150개로 불어나 있었습니다. 남반구의 작은 실험이 제도로 굳어진 것입니다.

소식은 북반구로 건너갔습니다. 영국은 1909년 무역위원회법을 만들어 스웨팅이 심하다고 지목된 네 개 업종에 임금 결정 기구를 두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12년 매사추세츠주가 여성과 아동에 한정한 최저임금법을 처음 도입합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 제도가 뿌리내리기까지는 앞으로 26년이 더 걸립니다.

미국 대법원이 두 번 뒤집다

1923년 연방대법원은 애드킨스 대 아동병원 사건에서 워싱턴 D.C.의 여성 최저임금법을 위헌이라고 판결합니다. 근거는 계약의 자유였습니다. 얼마를 받고 일할지는 당사자끼리 정할 문제인데 국가가 그 자유를 침해했다는 논리였습니다.

당시 미국 대법원은 이른바 로크너 시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계약의 자유를 헌법이 보호하는 핵심 권리로 보고, 노동시간 상한이나 임금 하한 같은 규제를 줄줄이 무효로 돌리던 시기를 말합니다. 애드킨스 판결은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대공황이 닥쳐 실업자가 거리에 넘치던 1936년에도 대법원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모어헤드 사건에서 뉴욕주의 최저임금법을 다시 위헌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뉴딜 정책을 밀어붙이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이 판결은 상당한 좌절이었습니다. 1937년 2월 5일, 루스벨트는 대법관 수를 늘릴 수 있게 하는 법원 개편안을 발표합니다. 자기 편 대법관을 더 임명해 판세를 뒤집겠다는 뜻으로 읽혔고, 여론과 의회의 거센 반발을 불렀습니다. 법안 자체는 끝내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1937년 3월 29일, 엘시 패리시의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옵니다. 대법원은 5대 4로 워싱턴주의 최저임금법이 합헌이라고 선언하고 애드킨스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오언 로버츠 대법관이 입장을 바꾼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아홉을 구한 때맞춘 변심이라고 불렀습니다. 다만 로버츠의 표결이 법원 개편안 발표보다 앞선 회의에서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그가 압박에 굴복한 것인지는 지금도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1938년, 시간당 25센트

헌법의 문이 열리자 입법은 빠르게 이어졌습니다. 1938년 6월 25일 루스벨트가 공정근로기준법에 서명합니다. 전국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시간당 25센트로 정하고, 주당 노동시간의 기준을 44시간으로 두었으며, 아동노동을 금지한 법이었습니다.

이 법을 밀어붙인 사람은 노동장관 프랜시스 퍼킨스였습니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던 그는 젊은 시절 뉴욕의 의류 공장 화재로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법 이름에 들어간 공정이라는 단어에는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완전한 법은 아니었습니다. 농업과 가사노동을 비롯해 여러 분야가 적용 대상에서 빠져 있었고, 그 결과 당시 미국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던 노동자 상당수가 보호 밖에 남았습니다. 적용 범위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조금씩 넓어졌습니다.

한국은 1988년에 출발선에 섰습니다

한국의 최저임금법은 1986년 12월 31일에 제정되어 1988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습니다. 이른바 3저 호황이라 불리던 시기, 경제는 빠르게 커지고 있었지만 임금 격차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 의제가 되던 무렵이었습니다.

첫해의 최저임금 수준은 상징적인 수준에 가까웠습니다. 당시 실제 노동자들이 받던 임금의 30%에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남아 있습니다. 적용 대상도 일정 규모 이상의 제조업으로 한정되어 있었고, 이후 업종과 규모를 넓혀 가며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근로자위원, 사용자위원, 공익위원이 모인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이듬해 적용될 금액을 심의해 의결합니다. 여름마다 언론에 오르내리는 그 진통의 무대가 바로 이 위원회입니다. 2026년에 적용되는 최저임금은 시간당 10,320원으로 전년 대비 2.9% 인상된 금액이었고, 2027년 적용분은 시간당 10,700원으로 3.7% 인상이 의결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고용을 줄이는가

경제학 교과서의 오래된 답은 명확했습니다. 어떤 물건의 가격에 정부가 하한선을 그으면 그 가격에서는 사려는 양이 줄어듭니다. 노동도 마찬가지라면, 최저임금을 올릴수록 일자리는 줄어야 합니다. 20세기 내내 이것이 거의 상식이었고, 논쟁의 여지가 크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 상식에 1994년 데이비드 카드와 앨런 크루거가 이 상식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연구를 내놓습니다. 1992년 4월 1일 뉴저지주가 최저임금을 시간당 4달러 25센트에서 5달러 5센트로 올렸는데, 두 사람은 뉴저지와 바로 옆 펜실베이니아의 패스트푸드점 410곳을 인상 전후로 조사했습니다. 최저임금이 오르지 않은 펜실베이니아를 비교 대상으로 삼은 것입니다.

결과는 뜻밖이었습니다. 뉴저지의 고용이 줄지 않았고 오히려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수요독점이라는 개념이 자주 등장합니다. 한 지역에서 일자리를 제공하는 고용주가 몇 안 되면 고용주가 임금을 낮게 눌러 둘 힘을 갖게 되는데, 이런 시장에서는 최저임금이 임금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리면서 고용까지 늘릴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반론은 곧바로 나왔습니다. 데이비드 노이마크와 윌리엄 워셔는 전화 설문 대신 실제 급여 대장 자료를 구해 같은 사건을 다시 분석했고, 뉴저지의 고용이 펜실베이니아 대비 감소했다는 정반대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카드와 크루거는 다시 정부 통계를 동원해 재반박했고, 논쟁은 어느 한쪽의 판정승 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대치는 지금도 반복됩니다. 2017년 시애틀의 최저임금 인상을 두고 워싱턴대 연구진은 시급은 올랐지만 근로시간이 줄어 저임금 노동자의 총소득이 오히려 줄었다는 결과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연구진은 부정적 영향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결과를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했습니다. 같은 도시, 같은 정책인데 결론이 갈린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2021년 데이비드 카드는 노벨경제학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수상 사유는 최저임금 논쟁에서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정책 변화를 실험처럼 활용해 인과관계를 따지는 방법론을 정착시켰다는 것이었습니다. 함께 연구했던 크루거는 2019년에 세상을 떠나 수상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다수의 연구자들이 공유하는 대체적인 감각은, 인상 폭과 그 지역의 임금 수준에 따라 효과가 달라진다는 쪽입니다. 완만한 인상은 고용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연구가 많지만, 지역 평균 임금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수준으로 급하게 올릴 경우에는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연구도 적지 않습니다. 물론 이 정리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여전히 많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130년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최저임금을 두고 맞선 양쪽 모두 진지한 근거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쪽도 데이터를 지어내지 않았고, 어느 쪽도 상대를 무지하다고 몰아세울 만큼 압도적인 증거를 손에 쥐지 못했습니다. 노벨상을 받은 연구가 나온 뒤에도 논쟁이 이어지는 분야는 생각보다 드뭅니다.

시장에서 이 주제를 접하는 투자자라면 기억해 둘 만한 대목이 있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최저임금 결정 소식이 나오고, 그때마다 특정 업종의 운명이 숫자 하나로 결정된다는 식의 단정적인 이야기가 함께 돌아다닌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30년 넘게 연구해 온 학자들도 합의에 이르지 못한 질문을, 뉴스 한 줄이 해결해 줄 리는 없습니다.

엘시 패리시가 청구한 216달러는 그리 큰 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청구서 한 장이 헌법 해석을 바꾸고, 전국 단위 노동법을 열어젖히고, 결국 오늘 한국의 여름마다 반복되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는 이 글이 정해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그 질문이 왜 130년 동안 풀리지 않았는지를 알고 나면, 매년 돌아오는 그 소식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읽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