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오전 11시, 은행들이 적어낸 숫자
2026-09-26 · 8분 읽기
매일 오전 11시, 런던의 몇몇 은행에서는 담당 직원 한 사람이 컴퓨터 앞에 앉아 숫자 하나를 적어 보냈습니다. 복잡한 계산도, 거래 영수증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오늘 우리 은행이 다른 은행에서 돈을 빌린다면 대략 몇 퍼센트에 빌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답은 실제로 체결된 거래 기록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판단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인 숫자들의 평균이 리보(LIBOR), 우리말로 런던 은행간 금리라고 불리는 지표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표는 전 세계 300조 달러가 넘는 대출과 계약의 기준이었습니다. 미국의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과 학자금 대출, 자동차 할부, 기업 대출, 각종 파생상품이 모두 이 숫자에 연결돼 있었습니다. 파생상품이란 금리나 환율처럼 다른 무언가의 값이 오르내리는 데 따라 손익이 정해지는 계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세계 금융의 잣대가 되는 숫자가, 실제로 거래된 가격이 아니라 은행들이 스스로 적어낸 어림짐작의 평균이었다는 뜻입니다. 이 허술한 구조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습니다. 2012년 여름부터 터져 나온 이야기는 금융 역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지표 조작 사건으로 불리게 됐고, 놀랍게도 그 결말은 202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그것도 많은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정리됐습니다.
300조 달러를 받치고 있던 설문조사
리보의 계산 방식은 지금 보면 놀라울 만큼 단순했습니다. 통화별로 지정된 패널 은행들이 매일 자기 은행의 예상 조달금리를 적어 냅니다. 계산 기관은 그 숫자들을 크기 순으로 줄 세운 뒤 위아래 각각 4분의 1을 잘라 버리고, 가운데 남은 값들만 평균을 냅니다. 이 평균이 그날의 리보로 발표됐고, 달러와 유로를 비롯한 다섯 개 통화, 하루짜리부터 1년짜리까지 일곱 개 만기에 대해 각각 산출됐습니다.
왜 이런 방식이었을까요. 리보는 1980년대 런던 금융가의 관행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지표였습니다. 은행들이 서로 얼마에 돈을 빌려주는지는 그 은행들이 가장 잘 알 테니, 당사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만기가 긴 은행간 대출은 실제 거래가 하루에 몇 건밖에 없거나 아예 없는 날도 있었습니다. 실거래가 없으면 추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오랫동안 통했습니다.
문제의 씨앗은 그 논리 안에 이미 들어 있었습니다. 숫자를 적어내는 직원과, 그 숫자가 조금만 움직여도 손익이 바뀌는 트레이더가 같은 회사에, 때로는 같은 층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출값을 검증할 근거 자료를 내야 할 의무도 사실상 없었습니다. 이해가 충돌하는 자리에 칸막이를 세우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누군가의 일탈이 아니라 설계의 결함이었습니다.
0.01퍼센트만 부탁드립니다
파생상품 계약은 리보가 0.01퍼센트포인트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손익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계약 금액 자체가 수십억 달러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어떤 트레이더에게는 그날의 리보가 조금 높게 나오는 편이, 다른 트레이더에게는 조금 낮게 나오는 편이 유리했습니다. 그리고 그 숫자를 적어내는 사람은 복도 저쪽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후 규제당국이 공개한 자료에는 트레이더가 제출 담당자에게 특정 방향으로 숫자를 적어 달라 부탁하고, 담당자가 그에 맞춰 조정한 정황이 담겨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같은 회사 안에서 오가던 부탁이 나중에는 다른 은행 사람에게까지 건너갔고, 여러 은행을 상대하는 중개 브로커가 그 사이를 이어 주기도 했습니다. 기록에는 고맙다는 인사와 술 한잔 사겠다는 약속 같은 표현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다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위아래를 잘라내고 평균을 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한 은행이 혼자 숫자를 크게 비틀어도 결과값은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잘려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핵심은 한 사람의 대담함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같은 방향의 부탁이 관행처럼 오갔다는 점에 있습니다. 실제로 지표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숫자로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위기의 은행들이 숫자를 낮춘 이유
그런데 조작 의혹에는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번째 갈래가 있었습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이어진 금융위기 국면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리보 제출값은 사실상 그 은행이 시장에서 얼마나 신뢰받고 있는지를 스스로 고백하는 숫자였습니다. 높은 금리를 적어내는 것은 우리 은행은 돈을 비싸게 빌려야 한다는 뜻, 즉 우리 형편이 좋지 않다는 신호였습니다.
은행들이 줄줄이 흔들리던 시기에 그런 신호는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일부 은행이 실제 조달 사정보다 낮은 숫자를 적어냈다는 것이 이른바 저평가 제출 의혹입니다. 이쪽은 트레이더 개인의 보너스가 아니라 회사의 평판과 생존이 걸린 문제였고, 조직 상층부의 판단이 개입했다는 의혹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중에는 당국이 이런 사정을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도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2008년 무렵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영국 중앙은행에 우려를 전달했고, 일부 언론도 이미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방향이 반대라는 점은 피해자의 얼굴도 바꿉니다. 리보가 낮게 나오면 그 금리에 연동된 대출을 쓰던 사람은 이자를 덜 냅니다. 반대로 리보에 연동된 채권이나 예금성 상품으로 이자를 받던 쪽은 덜 받습니다. 누가 얼마를 손해 봤는지 계산하는 일이 지독히 어려웠고, 전 세계에서 이어진 민사 소송이 오래 끌린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6월, 뚜껑이 열렸습니다
사건이 대중에게 알려진 순간은 2012년 6월 27일이었습니다. 영국 바클레이즈가 미국과 영국 규제당국과 합의하면서 약 4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제재금을 내기로 한 날입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에 2억 달러, 미국 법무부에 1억 6천만 달러, 영국 금융감독당국에 5,950만 파운드를 내는 조건이었습니다. 이때 함께 공개된 내부 메시지 기록이 여론에 불을 붙였습니다.
파장은 빨랐습니다. 합의 발표 엿새 뒤인 2012년 7월 3일 밥 다이아몬드 바클레이즈 최고경영자가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튿날 영국 의회 청문회에 불려 나갔습니다. 한 은행의 합의로 시작된 일이 업계 전체에 대한 조사로 번졌습니다.
이후 몇 해에 걸쳐 제재가 이어졌습니다. 2012년 12월 스위스 UBS가 10억 달러를 넘는 금액을, 2013년 2월 영국 RBS가 약 6억 1,200만 달러를, 2015년 4월 독일 도이체방크가 약 25억 달러를 내기로 했습니다. 통화별 지표와 외환 부문까지 포함해 전 세계 은행들이 관련 조사에서 문 돈은 90억 달러를 넘었습니다.
주가와 실적에도 상처가 남았지만 더 큰 손실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기준 자체가 의심받으면 그 기준으로 맺은 모든 계약이 흔들립니다. 세상의 잣대가 휘어 있었다는 소식은, 그 자로 재어 만든 수백조 달러어치 약속을 한꺼번에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법정에서 뒤집힌 유죄
이 사건은 기업 제재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는 여러 명의 트레이더가 형사 재판에 넘겨졌고 일부는 유죄, 일부는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 UBS와 시티그룹을 거친 톰 헤이즈였습니다. 그는 2015년 8월 유죄 판결과 함께 14년형을 선고받았고, 항소심에서 형이 11년으로 줄었습니다. 유로화 기준 지표인 유리보와 관련해 기소된 카를로 팔롬보는 2019년에 4년형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며 법정의 판단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2022년 항소법원이 트레이더 두 명에 대해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헤이즈를 상대로 남아 있던 미국 측 기소도 취하됐습니다. 영국에서는 2024년 항소법원이 두 사람의 항소를 기각하면서도, 이 사건에 공익상 중요한 법률 쟁점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2025년 7월 23일, 영국 대법원은 만장일치로 헤이즈와 팔롬보의 유죄를 파기했습니다. 핵심 이유는 재판 진행 방식에 있었습니다. 대법원은 1심 재판부가 배심원단에게 리보 제출값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법률 문제처럼 못 박아 지시한 것이 잘못이라고 봤습니다. 제출한 숫자가 거짓이거나 오해를 부르는 것이었는지는 사실관계의 문제이며, 배심원단이 스스로 판단해야 할 몫이라는 것입니다.
판결문의 논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리보의 정의 자체가 합리적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추정값의 범위를 허용하고 있었고, 제출자에게 상업적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그 제출이 곧바로 부정직한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국 중대부정수사청은 재심을 청구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래서 오늘 기준으로는, 이 사건에서 개인의 형사 책임이 확정된 상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업 차원의 합의와 제재는 남았지만, 개인에 대한 유죄는 상급심에서 지워졌습니다.
지표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규제당국이 내린 결론은 사람을 더 엄하게 감시하자는 쪽이 아니었습니다. 지표 자체를 갈아치우기로 한 것입니다. 관리 주체가 바뀌고 산출 규정이 강화됐지만, 물어봐서 만드는 숫자라는 근본 구조는 고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리보는 단계적으로 수명을 마치게 됐습니다.
2021년 말을 기점으로 파운드, 유로, 엔, 스위스프랑 등 대부분 통화의 리보 산출이 멈췄습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달러 리보의 주요 만기도 2023년 6월 30일 패널 제출이 종료됐습니다. 40년 가까이 세계 금융의 기준이었던 숫자가, 조작 사건이 알려진 지 11년 만에 조용히 퇴장한 것입니다.
자리를 물려받은 지표들은 설계 철학이 다릅니다. 미국의 SOFR, 영국의 소니아 같은 새 기준금리는 실제 체결된 거래 가격을 모아 계산합니다. 물어보는 지표에서 관찰하는 지표로 옮겨 간 셈입니다. 이 전환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년 만기 계약서에 적힌 기준금리 문구를 하나하나 바꿔야 했고, 세계 금융업계가 몇 년을 이 작업에 쏟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리보 사건이 남긴 첫 번째 질문은 아주 실용적인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숫자는 누가, 어떤 방식으로 만든 것인가. 시장에는 지수, 기준금리, 각종 평가 등급처럼 남이 만들어 준 숫자가 넘칩니다. 그중 어떤 것은 실제 거래를 집계한 결과이고, 어떤 것은 누군가의 판단이나 설문을 모은 결과입니다. 둘은 이름만 비슷하고 성질이 전혀 다릅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도덕성보다 구조를 보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충돌하는 두 역할을 한 사람이나 한 부서가 쥐고 있으면, 언젠가는 문제가 생깁니다. 리보 사건에서 가장 오래 남은 교훈은 누가 나쁜 사람이었는지가 아니라, 나쁜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 수 없게 설계돼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조금 불편한 교훈입니다. 사건이 터진 직후의 단정적인 이야기가 10년 뒤에도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구조적 허점은 분명히 있었고 기업들은 막대한 제재를 받았지만, 개인에게 씌워진 책임의 크기는 법정에서 다시 다뤄졌습니다. 뉴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수백조 달러가 매일 오전 11시의 어림짐작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는 사실은, 금융이라는 것이 결국 서로가 적어낸 숫자를 믿어 주는 약속의 더미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면 가격보다 먼저 기준이 무너집니다. 리보는 사라졌지만 남이 만들어 준 숫자에 의지해 값을 정하는 구조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약속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 번씩 들여다보는 습관은, 어떤 시장에 있든 손해 볼 일이 없는 습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