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카메라를 처음 만든 회사가 사라진 이유
2026-09-23 · 7분 읽기
1975년 겨울, 미국 뉴욕주 로체스터의 코닥 연구실에서 스물넷의 신입 엔지니어가 이상한 물건을 들고 나타났습니다. 무게 3.6킬로그램에 토스터만 한 크기, 안에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을 담는 데 23초가 걸렸고, 해상도는 가로세로 100픽셀, 요즘 단위로 0.01메가픽셀이었습니다. 흑백이었고, 찍은 사진을 보려면 테이프를 다시 읽어 텔레비전 화면에 띄워야 했습니다.
그 신입 엔지니어의 이름은 스티븐 새슨이었고, 그가 들고 있던 물건은 세계 최초의 휴대형 디지털카메라였습니다. 필름이 한 장도 들어가지 않는 카메라였습니다. 그는 훗날 회사 경영진에게 이것을 보여주었을 때 돌아온 반응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재미있긴 한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그로부터 37년 뒤인 2012년 1월, 필름이라는 단어와 거의 동의어였던 이 회사는 뉴욕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낸 기술에 밀려서였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정답을 가장 먼저 손에 쥐고도 그것을 쓰지 못한 회사, 그리고 같은 시기에 전혀 다른 길을 걸은 경쟁자에 관한 것입니다.
면도기를 공짜로 주는 회사
코닥이 어떤 회사였는지부터 짚어야 합니다. 1888년 창업자 조지 이스트먼이 내건 문구는 유명합니다. 버튼만 누르세요, 나머지는 우리가 합니다. 그때까지 사진은 전문가의 영역이었는데, 코닥은 그것을 평범한 사람의 일상으로 끌어내렸습니다. 20세기 내내 미국 가정의 추억은 노란 상자에 담겨 있었습니다.
이 회사의 수익 구조는 흔히 면도기와 면도날에 비유됩니다. 카메라 본체는 싸게 팔거나 사실상 밑지고 팔아도, 그 뒤에 소비자가 평생 사게 되는 필름과 인화지, 현상 약품에서 돈을 벌었습니다. 한 번 카메라를 쥐어주면 수십 년간 소모품 매출이 따라붙는 구조였습니다. 마진이 매우 높았고, 경쟁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화학 기술이 그 마진을 지켜주었습니다.
성과는 압도적이었습니다. 1996년 코닥은 미국 필름 시장의 80% 이상을 쥐고 있었고, 그해 매출은 160억 달러 안팎으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 전 세계 임직원은 14만 명을 넘었습니다. 미국 학생들이 안정적인 직장의 대명사로 꼽던 회사였고, 로체스터라는 도시 자체가 이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새슨이 들고 온 물건은 기술적으로는 조악한 장난감이었지만, 사업적으로는 회사의 심장을 겨눈 물건이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 필름이 팔리지 않습니다. 인화지도, 현상 약품도 필요 없어집니다. 회사에서 가장 돈을 잘 버는 부문 전체가 사라진다는 뜻이었습니다.
서랍 속에 들어간 특허
경영진은 이 기술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특허로 단단히 묶어두었습니다. 새슨과 동료 개릿 로이드의 이름으로 1977년 전자식 스틸 카메라 특허가 출원되었고, 이후 코닥은 디지털 이미징 분야에서 방대한 특허를 쌓아 올렸습니다. 연구는 계속되었고 실험실에서는 계속 앞서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시장에 내놓는 일에는 속도를 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흔한 오해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코닥이 디지털을 몰랐다거나 무시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코닥은 1990년대 중반 일반 소비자용 디지털카메라를 내놓았고, 2000년대 중반에는 미국 시장에서 디지털카메라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해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팔아도 돈이 남지 않았다는 데 있었습니다.
디지털카메라는 전자제품입니다. 전자제품 시장에서는 부품을 사다 조립해 파는 업체들이 순식간에 가격을 끌어내립니다. 필름처럼 한 번 팔고 나서 계속 따라붙는 소모품도 없습니다. 카메라 한 대를 팔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코닥은 매출이 큰 사업을 이익이 거의 없는 사업으로 갈아타야 하는 상황이었고, 그 갈아타기를 매 분기 실적 발표를 하면서 해내야 했습니다.
조직 내부의 힘도 문제였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큰 매출과 가장 많은 인원, 가장 높은 이익률을 가진 쪽은 언제나 필름 부문이었습니다. 이익이 나지 않는 신사업이 예산 회의에서 이익이 잘 나는 기존 사업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는 모두 합리적으로 판단했지만, 그 합리적인 판단들이 모여 회사 전체를 한 방향에 묶어두었습니다.
특허로 버틴 시간
2000년대 들어 필름 시장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줄어들었습니다. 휴대폰에 카메라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속도는 더 붙었습니다. 매출이 줄어드는 동안 코닥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반복했습니다. 2005년 취임한 안토니오 페레스 최고경영자 시기를 전후해 수만 명 규모의 인력이 회사를 떠났고, 공장이 차례로 문을 닫았습니다.
그 시기 회사를 지탱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랍 속에 쌓아둔 특허였습니다. 디지털 이미징 기술 특허를 다른 기업들에 빌려주고 받은 사용료는 2003년부터 2011년까지 30억 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카메라를 팔아서가 아니라, 남이 카메라와 휴대폰을 파는 데 쓰는 기술의 값을 받아 살아간 것입니다. 코닥은 애플과 림 같은 회사를 상대로 특허 소송도 제기했습니다.
특허 사용료는 성격상 시한부입니다. 특허에는 만료일이 있고, 소송은 이길 때도 있지만 질 때도 있습니다. 2012년 초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애플을 상대로 한 코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버티게 해주던 마지막 수입원의 앞날이 불투명해진 순간이었습니다.
2012년 1월 19일, 코닥은 챕터 11이라 불리는 파산보호를 신청했습니다. 이는 회사를 즉시 청산하는 절차가 아니라, 법원의 보호 아래 빚을 조정하고 사업을 재편할 시간을 얻는 제도입니다. 코닥은 씨티그룹으로부터 9억 5천만 달러 규모의 자금을 조달해 영업을 이어갔습니다. 1888년부터 이어진 회사가 법원의 관리 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가장 아픈 숫자
파산보호 절차에서 코닥은 자산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중 가장 값나가는 자산으로 꼽힌 것이 바로 그 디지털 이미징 특허 묶음이었습니다. 외부 평가기관들은 이 포트폴리오의 가치를 18억 달러에서 45억 달러 사이로 추정했습니다. 회사 안팎에서도 이 특허가 재기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달랐습니다. 2012년 말, 애플과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삼성, 아마존, 어도비 등 십여 개 기업이 컨소시엄을 꾸려 공동으로 인수했고, 이미징·인쇄 특허와 나머지 특허 사용권을 합쳐 지불한 금액은 총 5억 2,700만 달러였습니다. 특허 포트폴리오 자체에 매겨진 값만 따지면 9,400만 달러에 그쳤습니다. 기대치의 극히 일부였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사실이 더해집니다. 그 컨소시엄에는 후지필름도 이름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필름 시장에서 경쟁해 온 회사가, 무너진 경쟁자의 특허를 나눠 사는 쪽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코닥은 2013년 9월 파산보호에서 벗어났습니다. 다만 돌아온 모습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소비자용 필름과 카메라의 거인이 아니라, 인쇄와 산업용 소재, 화학 분야에 집중하는 훨씬 작은 회사였습니다. 한때 14만 명을 넘었던 임직원 수는 이후 수천 명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같은 파도를 맞은 다른 회사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후지필름이 똑같은 파도를 맞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결코 더 낫지 않았습니다. 2000년대 초 컬러필름 수요는 절벽처럼 무너졌습니다. 현상소가 하루에 취급하던 필름이 반년 만에 5천 통 수준에서 천 통 아래로 떨어질 정도의 속도였다고 이 회사 경영진은 회고합니다. 회사 이익의 상당 부분이 이 부문에서 나오고 있었습니다.
2000년대 초 회사를 이끈 고모리 시게타카는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하나는 필름 사업을 필요한 만큼 축소하는 고통스러운 구조조정이었습니다. 공장을 닫고 현상소 네트워크를 정리하며 수천 명 규모의 인력을 줄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렇게 확보한 자원을 완전히 다른 곳에 쏟아붓는 일이었습니다.
후지필름은 자사가 가진 진짜 자산이 필름이 아니라 그 안에 든 기술이라고 다시 정의했습니다. 필름의 주원료인 콜라겐은 사람 피부의 주성분과 같은 물질이고, 필름이 변색되지 않게 막는 항산화 기술은 피부 노화를 다루는 기술과 통했습니다. 수십 년간 쌓은 정밀 코팅 기술은 액정 패널용 필름과 반도체 소재로 이어졌습니다. 2007년 화장품 브랜드 아스타리프트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회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의료와 제약 쪽으로 크게 방향을 틀었습니다. 2008년에는 제약사 도야마화학을 인수했고, 이후 바이오 의약품 위탁생산과 의료 영상 장비로 사업을 넓혔습니다. 오늘날 이 회사에서 가장 큰 매출을 차지하는 부문은 사진이 아니라 헬스케어입니다. 필름을 만들던 회사가 필름을 놓아주고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코닥 이야기는 흔히 변화를 거부한 공룡의 우화로 소비됩니다. 그러나 실제 기록을 따라가 보면 그런 단순한 교훈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코닥은 기술을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기술의 위협도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디지털 제품을 실제로 만들어 팔기도 했습니다. 부족했던 것은 정보나 기술이 아니라, 잘 벌고 있는 사업을 스스로 무너뜨릴 결심이었습니다.
여기서 투자자에게 남는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떤 회사의 실적이 좋을 때, 그 좋은 실적이 회사의 미래를 막고 있지는 않은가. 이익률이 높은 사업일수록 그것을 포기하는 결정은 어려워집니다. 가장 잘 버는 부문이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갖는 것은 거의 모든 조직의 자연스러운 생리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을 파는 회사인가라는 정의의 문제입니다. 코닥은 오랫동안 자신을 필름 회사로 정의했습니다. 후지필름은 위기 앞에서 자신을 화학과 소재 기술을 가진 회사로 다시 정의했습니다. 같은 자산을 가지고도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느냐에 따라 갈 수 있는 길이 달라졌습니다.
세 번째는 특허나 브랜드 같은 무형자산을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코닥의 특허는 한때 회사를 몇 년간 먹여 살렸지만, 막상 팔아야 할 때가 되자 기대치의 극히 일부로 정리되었습니다. 무형자산의 가치는 팔려는 쪽이 아니라 사려는 쪽이 정합니다. 그리고 급하게 팔아야 하는 쪽은 언제나 불리한 자리에 섭니다.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시간의 문제입니다. 1975년 그 투박한 기계는 사진 한 장에 23초를 썼습니다. 당시 기준으로는 누구도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 만큼 느렸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기술은 처음 등장할 때 대체로 형편없어 보입니다. 지금 우스워 보이는 어떤 것이 20년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지, 그 질문을 미루지 않는 일이 결국 남는 숙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