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인스와 하이에크, 90년째 끝나지 않은 논쟁
2026-09-17 · 7분 읽기
2010년 1월, 유튜브에 기묘한 영상 하나가 올라옵니다. 양복을 차려입은 두 남자가 호텔 연회장과 뒷골목을 오가며 랩으로 서로를 공격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명은 경기가 죽었으니 정부가 돈을 써야 한다고 외치고, 다른 한 명은 그렇게 뿌린 돈이 다음 거품을 만든다고 맞받습니다. 경제학 강의 영상이 수백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영상 속 두 사람의 이름은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하이에크입니다. 케인스는 1883년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1946년에 세상을 떠났고, 하이에크는 1899년 빈에서 태어나 1992년까지 살았습니다.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맞붙은 것은 1930년대 초, 지금으로부터 아흔 해도 더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왜 2008년 금융위기가 터진 뒤에 이 오래된 싸움이 랩 영상으로까지 되살아났을까요. 경기가 무너졌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인류가 여전히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어느 쪽이 옳았는지 판정하려는 글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두고 다퉜는지를 따라가 보려는 글입니다.
같은 환자를 두고 갈린 두 개의 진단
1929년 주가 대폭락 이후 세계 경제는 길고 깊은 침체에 빠집니다. 공장은 멈췄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쳤습니다. 기묘한 것은 물건을 만들 공장도, 일할 사람도, 심지어 돈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점입니다. 설비와 노동력이 멀쩡히 있는데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 상태, 그것이 대공황이었습니다.
케인스의 진단은 수요가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불안해서 지갑을 닫으면 물건이 안 팔리고, 물건이 안 팔리면 기업은 직원을 내보내고, 잘린 사람들은 더 지갑을 닫습니다. 각자에게는 합리적인 절약이 모두에게는 재앙이 되는 악순환입니다. 이 고리는 저절로 끊어지지 않으니, 민간이 안 쓰는 동안 정부가 대신 돈을 써서 수요의 구멍을 메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처방이었습니다.
하이에크의 진단은 정반대 지점을 짚었습니다. 문제는 불황이 아니라 그 앞의 호황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게 유지하면, 원래대로라면 수지가 맞지 않았을 사업에까지 돈이 흘러 들어갑니다. 이렇게 잘못된 곳에 자본이 쌓이는 현상을 그는 과오투자라고 불렀습니다. 불황이란 그 오류가 청산되는 과정이며, 아프지만 필요한 조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사람의 차이는 마음씨의 차이가 아니었습니다. 케인스는 불황 자체를 병으로 보았고, 하이에크는 불황을 이미 걸린 병의 치료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병으로 보면 서둘러 멈춰야 하고, 치료 과정으로 보면 함부로 중단해서는 안 됩니다. 같은 환자를 놓고 진단이 갈리니 처방이 정반대로 나온 것입니다.
케임브리지 대 런던, 논쟁의 실제 전개
1931년, 런던정경대의 라이어널 로빈스가 빈에 있던 하이에크를 영국으로 불러들입니다. 케인스가 이끄는 케임브리지 학파에 맞설 이론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하이에크는 그해 런던에서 한 강연을 묶어 가격과 생산이라는 책을 내놓습니다. 화폐가 생산의 규모뿐 아니라 방향까지 왜곡한다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같은 해 하이에크는 학술지 이코노미카에 케인스의 화폐론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서평을 싣습니다. 화폐론은 케인스가 1930년에 두 권으로 펴낸 대작이었습니다. 케인스는 곧바로 같은 학술지에 하이에크 박사에 대한 답변이라는 제목의 반박문을 올립니다. 학술지 지면을 오가는 공개 설전이 시작된 것입니다.
싸움은 곧 대리인 대결로 번집니다. 케인스의 요청을 받은 이탈리아 출신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가 1932년 이코노믹 저널에 하이에크의 이론을 조목조목 파고드는 글을 씁니다. 자연이자율이라는 개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는지 따져 묻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이에크가 같은 학술지에 응답했고 스라파가 다시 짧게 받아쳤습니다.
흔히 이 논쟁에서 누가 이겼다고들 하지만, 실제 결말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았습니다. 양쪽 모두 상대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은 채 각자의 언어로 말했고, 지면 위의 공방은 결론 없이 잦아들었습니다. 다만 하이에크의 이론이 난해하고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인상이 영어권 학계에 남았습니다.
일반이론, 그리고 전후의 압승
판을 완전히 뒤집은 것은 1936년에 나온 케인스의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경제가 완전고용이 아닌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오래 균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장이 알아서 제자리를 찾는다는 오랜 믿음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책에는 정부 지출의 승수효과라는 개념도 담겼습니다. 정부가 쓴 돈이 누군가의 소득이 되고 그 소득의 일부가 다시 소비되면서, 처음 투입한 금액보다 큰 총수요를 만들어 낸다는 설명입니다. 정책 담당자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논리는 없었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했고, 당장 실행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이에크는 이 책에 즉각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세계는 전쟁으로 빨려 들어갔고, 전후 질서를 짜는 자리에 앉은 사람은 케인스였습니다.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그는 영국 대표단을 이끌었습니다. 하이에크가 같은 해 3월 영국에서 내놓은 책은 경제학 이론서가 아니라 계획경제의 정치적 위험을 경고한 노예의 길이었습니다.
전후 삼십 년은 케인스의 시대였습니다. 각국 정부는 재정과 금리를 조절해 경기를 관리하는 것을 당연한 임무로 받아들였습니다. 1965년 말 타임지는 우리는 모두 케인스주의자라는 표현을 밀턴 프리드먼의 말로 소개했습니다. 프리드먼은 이듬해 편지를 보내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케인스주의자이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이제 아무도 케인스주의자가 아니라고 정정했습니다.
그 표현은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자신도 이제 경제학에서는 케인스주의자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며 다시 회자됩니다. 같은 시기 하이에크는 학계의 변방에 있었습니다. 그는 1950년부터 1962년까지 시카고대학에 있었지만 자리는 경제학과가 아니라 사회사상위원회였습니다. 전후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를 만드는 데 힘을 쏟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부른 재평가
케인스주의 정책의 실무적 근거 가운데 하나는 필립스 곡선이었습니다. 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서로 맞바꾸는 관계에 있다는 관찰로, 물가가 좀 오르는 것을 감수하면 실업을 줄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정부가 경기를 조절할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였으니 정책가들에게는 든든한 지도였습니다.
그러나 1968년 무렵 프리드먼과 에드먼드 펠프스는 그 관계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사람들이 물가가 계속 오를 것을 예상하기 시작하면 임금 요구에 그 기대를 반영하고, 그 순간 맞바꿈은 사라진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1973년 유가 급등을 계기로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물가와 실업이 동시에 치솟는 스태그플레이션이었습니다.
지도가 현실과 어긋나자 신뢰가 무너졌습니다. 정부가 돈을 풀면 경기가 산다는 공식이 통하지 않는 상황이 몇 해나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틈에서 오래 잊혔던 이름이 다시 불려 나왔습니다. 하이에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을 스웨덴의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받습니다. 여든을 바라보던 노학자가 다시 논쟁의 한가운데로 돌아온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자주 뭉뚱그려지는 대목이 있습니다. 1980년대 정책 전환을 이끈 이론적 주력은 통화 공급량을 중시한 프리드먼 쪽이었고, 하이에크의 경기변동 이론이 그대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되살아난 것은 하이에크의 모형이라기보다, 정부의 계획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그의 근본적 회의였습니다.
2008년, 두 사람이 다시 소환되다
2008년 가을 금융위기가 터지자 각국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2009년 2월 17일 약 7,870억 달러 규모의 경기회복 및 재투자법에 서명했고, 중앙은행들은 금리를 바닥까지 내린 뒤 자산을 직접 사들였습니다. 교과서적인 케인스식 대응이었고, 실제로 많은 논평이 케인스의 귀환을 선언했습니다.
반대편의 목소리도 곧 커집니다. 애초에 위기를 키운 것이 오랜 저금리와 넘치는 신용 아니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잘못된 곳에 쌓인 자본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다시 돈을 부어 정리를 미루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위기로 이월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이에크가 1930년대에 했던 말과 구조가 같았습니다.
이 논쟁은 학계 안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재정 적자를 얼마나 감당할 것인가, 부양을 언제 거둬들일 것인가를 두고 각국 정부와 의회가 갈렸고, 유럽에서는 긴축을 둘러싼 논쟁이 몇 해나 이어졌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2010년의 랩 영상이 그토록 널리 퍼진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자기 나라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뿌리를 그 영상에서 알아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결론이 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양책이 공황을 막았다고 보는 쪽과, 그 대가로 자산 가격만 부풀고 조정이 미뤄졌다고 보는 쪽이 지금도 나란히 존재합니다. 경제에는 대조군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양하지 않은 세계를 우리는 끝내 관찰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논쟁의 오래된 매력은 두 사람이 사실은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케인스는 지금 당장 굶는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하이에크는 그 조치가 십 년 뒤 어떤 구조를 남길 것인가를 물었습니다. 급한 불을 끄는 일과 불이 난 이유를 고치는 일은, 둘 다 필요하지만 같은 시간표 위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시장에서 오가는 말들도 실은 이 두 갈래의 변주인 경우가 많습니다. 금리를 더 내려야 한다는 주장과 이렇게 풀린 돈이 언젠가 대가를 치른다는 경고, 재정을 더 써야 한다는 목소리와 나랏빚이 한계에 왔다는 지적이 그렇습니다. 어느 쪽 뉴스를 보든 그 뒤에는 대개 90년 된 두 세계관 중 하나가 서 있습니다.
투자자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골라 신념으로 삼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지금 정책 결정자들이 어느 쪽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를 알아듣는 감각이 더 실용적입니다. 같은 지표를 놓고도 부양의 근거로 읽는 사람과 과열의 증거로 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시장의 반응이 훨씬 덜 낯설어집니다.
케인스와 하이에크는 모두 자기 시대의 가장 어려운 질문 앞에서 성실하게 답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느 한쪽이 이 논쟁을 끝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말이야말로 한 번 의심해 볼 만합니다. 아흔 해 동안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문제가 정답이 하나인 종류가 아니라는 가장 정직한 증거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