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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 파산한 단타의 원형

1891년 보스턴의 어느 증권사 지점, 열네 살 소년이 분필을 들고 벽에 걸린 호가판 앞에 서 있습니다. 하는 일은 단순했습니다. 전신으로 들어오는 가격을 받아 적어 벽에 옮기는 것이 전부였고, 주급은 5달러였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숫자를 옮겨 적는 동안 숫자가 움직이는 방식에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1년 뒤 그는 5달러를 들고 어느 가게에 생애 첫 베팅을 걸어 3달러 12센트를 손에 쥐었습니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1929년 가을, 같은 사람이 무너지는 시장에서 거액을 벌었다고 전해집니다. 가장 널리 인용되는 숫자는 1억 달러입니다. 그런데 그 가을로부터 다섯 해도 지나지 않은 1934년 3월, 그가 법원에 낸 파산 신청서에는 부채 225만 9212달러 48센트, 자산 18만여 달러가 적혀 있었습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이것을 그의 네 번째 실패이자 두 번째 공식 파산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글은 1억 달러와 18만 달러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의 이름은 제시 로리스턴 리버모어입니다. 소년 투기꾼이라는 뜻의 보이 플런저, 또는 월가의 큰 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사람입니다. 지금 호가창을 분 단위로 노려보는 단타 트레이더들이 쓰는 생각의 상당 부분이 이 사람에게서 흘러나왔습니다. 손실은 짧게 끊어라, 추세를 거스르지 마라, 손실 난 자리에 돈을 더 넣지 마라 같은 문장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문장을 만든 사람은 바로 그 문장을 어기면서 무너졌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네 번이었습니다.

열네 살, 호가판 앞의 소년

리버모어는 1877년 7월 26일 매사추세츠주 슈루즈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그가 열네 살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농장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묵인 아래 집을 나와 보스턴으로 향했고, 1891년 페인웨버 보스턴 지점에서 보드 보이, 즉 호가 적는 아이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주급 5달러는 당시로서도 넉넉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종일 한 일은 테이프에서 쏟아지는 가격을 벽에 옮겨 적는 단순 반복이었습니다.

여기서 테이프라는 말을 먼저 풀어야 합니다. 당시에는 화면도 앱도 없었고, 거래소의 체결 가격이 전신으로 전해져 가느다란 종이띠에 활자로 찍혀 나왔습니다. 그 종이띠를 뽑아내는 기계가 티커, 종이띠 자체가 테이프입니다. 가게마다 이 기계 한 대를 놓고 사람들이 둘러서서 종이가 기어 나오는 것을 들여다봤습니다. 리버모어가 들여다본 세계는 차트도 재무제표도 아니고 그 종이띠 한 줄이었습니다.

그는 숫자를 외우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호가를 적으면서 어떤 숫자 뒤에 어떤 숫자가 오는 경우가 많은지를 공책에 적어 두기 시작했고, 자기 기록으로 다음 움직임을 미리 적어 본 뒤 맞았는지 틀렸는지를 대조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혼자서 종이 위에 모의매매를 돌린 것입니다. 숫자 자체가 아니라 숫자가 움직이는 속도와 방향의 버릇을 본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왜 올랐는지에 대한 이유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1892년, 열다섯 살의 그는 친구의 권유로 시카고 벌링턴 앤드 퀸시 철도 주식 다섯 주에 5달러를 걸었습니다. 결과는 3달러 12센트의 이익이었습니다. 지금 보면 우스운 금액이지만, 주급 5달러를 받는 아이에게는 반나절 만에 반 주치 급여가 생긴 셈입니다. 그는 곧 직장을 그만두고 종일 그 일에만 매달렸고, 1893년과 1894년에는 주당 200달러 수준을 벌었다고 전해집니다. 어머니에게 1000달러를 가져다 드렸다는 이야기도 그 시기의 기록입니다.

버킷샵 — 주식을 사지 않고 주식에 거는 가게

그가 돈을 번 곳은 증권사가 아니었습니다. 버킷샵이라고 불린 가게였습니다. 버킷샵은 손님이 종목과 방향을 말하면 그 자리에서 표를 한 장 써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는 실제로 거래소에 주문을 내지 않았습니다. 손님의 주문은 가게 안의 장부에, 즉 통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고, 가게가 손님의 상대편이 되어 돈을 주고받았습니다. 주식은 단 한 주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906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버킷샵을 가격 변동에 대한 베팅을 등록할 뿐인 영업으로 정의했습니다. 베팅 금액은 보통 소액이라는 표현도 그 판단에 들어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는 주식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820년대 영국에서 거리의 아이들이 술집이 버린 맥주통에 남은 술을 양동이로 걷어다 무허가 술집에 팔았고, 그 술집들을 버킷샵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정식 중개업자가 받아주지 않는 자잘한 주문을 받는 가게들에 그 이름이 옮겨 붙었습니다.

규모는 작지 않았습니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호크펠더가 정리한 바에 따르면, 반도박 운동 측은 1890년 무렵 전국의 버킷샵을 약 5000곳으로 추산했습니다. 그중 뉴욕이 약 200곳, 시카고가 100곳이 넘었고, 인구 1만 명 이상의 도시에는 최소 한 곳은 있었다고 합니다. 세기가 바뀔 무렵에는 큰 업체들이 금융가로 들어와 지점망을 깔았는데, 하이트 앤드 프리즈는 북동부에 약 70개 지점, 코 커미션은 전국에 약 100개 사무소를 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손님을 끌어들인 무기는 증거금, 즉 맡기는 돈의 크기였습니다. 가게는 아주 적은 돈으로 훨씬 큰 금액을 움직일 수 있게 해줬습니다. 기록에 남은 최대 배율은 100대 1 수준으로, 1달러를 맡기면 100달러어치 주식에 거는 셈이었습니다. 거래소 중개업자들은 쳐다보지 않는 소액이었고, 하이트 앤드 프리즈는 비싼 중개업자를 쓸 수 없는 보통 사람들을 대놓고 광고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몇 달러만 있어도 주가에 베팅할 수 있다는 점이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접근성이었습니다.

문제는 청산 방식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가게는 증거금을 더 넣으라고 연락해주지 않았습니다. 손님에게는 번거롭지 않게 해드린다고 설명했지만, 실제로는 가격이 한 번만 선을 건드려도 그 자리에서 자동으로 정리되고 맡긴 돈이 전부 가게로 넘어간다는 뜻이었습니다.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에 남은 문장은 이 구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1포인트를 증거금으로 넣었다면 가격이 89와 4분의 1을 깨는 순간 자동으로 털린다는 것, 그리고 거래가 스스로 닫히고 표는 종이 쪼가리 한 장이 된다는 것입니다.

수수료도 처음부터 가격에 얹혀 있었습니다. 같은 책에는 20에 샀는데 표에는 20과 4분의 1로 적힌다는 서술, 그래서 내 돈이 움직일 여유는 4분의 3포인트밖에 없었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4분의 3포인트 조정만 와도 끝나는 구조였다는 말입니다. 더 나아가 큰 포지션을 떠안은 가게가 실제 거래소에서 물량을 던져 테이프 가격을 잠깐 끌어내리고 손님들을 털어버렸다는 의혹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개별 사건으로 확증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유인이 구조 안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구조만 떼어놓고 보면, 기초자산을 보유하지 않고 가격 차이에만 돈을 거는 오늘날의 차액결제 상품과 닮은 지점이 있습니다. 실물 주식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점, 적은 증거금으로 큰 금액에 노출된다는 점, 거래 상대가 거래소가 아니라 상품을 판 회사라는 점, 증거금이 기준선을 건드리면 자동으로 청산된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다만 버킷샵은 불법 또는 무규제 영역에서 굴러갔고, 지금의 차액결제 상품은 나라별로 인가와 레버리지 한도, 손실 경고 표기 같은 규제 아래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권하거나 말리려는 것이 아니고, 100년 전에 이미 같은 모양의 구조가 있었다는 사실만 적어둡니다.

테이프 리딩 — 숫자의 흐름만 보고

리버모어의 방법에는 테이프 리딩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종이띠를 읽는다는 뜻입니다. 기업의 실적이나 산업 전망, 배당 같은 것을 보지 않고, 체결 가격과 거래량이 찍혀 나오는 순서만 보고 다음 움직임을 가늠하는 방식입니다. 가격이 어느 구간에서 오래 머무는지, 매도가 쏟아지는데도 가격이 버티는지, 조금씩 올라오던 숫자가 갑자기 뜀박질을 하는지를 봅니다. 지금 호가창과 체결창을 보며 매수와 매도의 힘을 가늠하는 일의 조상입니다.

이 방법은 리버모어 혼자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같은 시기에 리처드 와이코프 같은 사람들이 이 기술을 글로 정리했고, 테이프 리딩 연구라는 제목의 책이 따로 나올 만큼 하나의 분야였습니다. 당시에는 기업 정보가 지금처럼 공개되지 않았고, 분기 보고서도 실시간 공시도 없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빠르고 거의 유일한 정보가 그 종이띠에 찍힌 숫자였습니다.

그가 버킷샵에서 강했던 이유에는 구조적인 사정도 있습니다. 버킷샵의 손익은 테이프에 찍힌 숫자 하나로 즉시 정해졌습니다. 사겠다고 말한 순간의 가격이 그대로 내 가격이었고, 팔겠다고 말한 순간의 가격이 그대로 청산 가격이었습니다. 체결을 기다릴 필요도, 주문이 시장에 닿는 사이에 가격이 달아날 걱정도 없었습니다. 즉 테이프를 읽는 능력이 곧바로 돈이 되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초기 성공은 재능과 환경이 맞아떨어진 결과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숫자의 버릇을 읽는 눈이 있었고, 그 눈이 지연 없이 돈으로 바뀌는 가게가 있었습니다. 뒤에 보겠지만 이 환경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무너집니다. 같은 능력이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하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이 대목은 글 끝의 논쟁과 바로 연결됩니다.

너무 많이 따서 쫓겨난 소년

1895년부터 1897년 사이에 그는 거래 이익으로 1만 달러를 모았다고 전해집니다. 문제는 그 돈이 전부 가게 주인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버킷샵의 수익 구조는 손님이 잃어야 가게가 버는 구조였습니다. 손님 한 사람이 꾸준히 이기면 그 사람은 가게의 손실 항목 자체가 됩니다. 그래서 1897년 무렵에는 보스턴의 거의 모든 버킷샵이 그의 출입을 막았습니다.

쫓겨난 뒤의 일화들은 꽤 재미있게 전해집니다. 다른 이름을 쓰고 다른 가게 지점을 돌았다거나, 옷차림과 말투를 바꿔 다른 사람처럼 들어갔다거나, 지인을 내세워 대신 베팅을 넣었다는 식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습니다. 다만 이 중 상당수는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이라는 책의 서술과 그 책을 받아 적은 후대 전기들에 기대고 있어, 1차 사료로 하나하나 확인되는 종류의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게 전해진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분명한 쪽은 출입 금지 자체가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는 점입니다.

1898년부터 1900년까지 그가 드나든 곳은 하이트 앤드 프리즈였습니다. 아직 그를 받아주는 마지막 가게였습니다. 그런데 이 가게도 결국 방어에 들어갔습니다. 사고파는 가격 사이의 간격을 넓히고, 요구하는 증거금을 올렸습니다. 같은 베팅을 하려면 더 많은 돈을 걸어야 하고, 수수료 부담이 커져 이익이 남을 여지가 줄어드는 조치였습니다.

책에 나오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가게의 대응은 더 노골적입니다. 증거금을 3포인트로 올리고, 거기에 프리미엄이라는 이름의 추가 부담을 처음에는 반 포인트, 다음에는 1포인트, 마지막에는 1.5포인트까지 물렸다는 서술이 남아 있습니다. 즉 들어가는 순간 1.5포인트를 깔고 시작하라는 뜻입니다. 이기는 손님을 규칙을 바꿔서 쫓아낸 셈입니다. 가격을 올려 손님을 내보내는 방식은 지금도 어느 시장에서나 쓰이는 수법입니다.

버킷샵과 거래소의 싸움도 같은 시기에 진행 중이었습니다. 1889년 뉴욕증권거래소는 버킷샵을 말려 죽이려고 전신 시세 공급을 끊어봤지만, 자기 고객과 회원 중개업자들이 더 다쳐서 며칠 만에 되돌렸습니다. 승부가 갈린 것은 1905년 5월, 연방대법원이 거래소가 자기 시세의 주인이고 그것을 줄지 말지 정할 수 있다고 판단한 뒤였습니다. 그 뒤 몇 해에 걸쳐 버킷샵은 사실상 사라졌고, 1922년 뉴욕주의 마틴법으로 제도적인 뚜껑이 덮였습니다.

정식 거래소로 옮긴 뒤 처음 무너진 날

1900년 9월 14일, 그는 뉴욕으로 옮깁니다. 이번에는 버킷샵이 아니라 실제로 거래소에 주문을 내주는 중개회사였습니다. 처음에는 놀라운 출발이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만 달러를 닷새 만에 5만 달러로 불렸습니다. 버킷샵에서 쓰던 방법이 큰 무대에서도 통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1901년 5월, 그는 가진 돈을 전부 잃었습니다. 원인은 그의 판단이 틀렸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테이프가 시장을 따라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뒷날 그 패배를 느린 테이프와 그날의 전례 없이 격렬한 움직임 탓으로 돌렸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체결 지연과 호가 차이, 즉 슬리피지에 얻어맞은 것입니다.

구조를 보면 이유가 분명합니다. 버킷샵에서는 테이프에 찍힌 숫자가 곧 내 거래 가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식 중개회사에서는 주문이 전신을 타고 거래소 바닥의 입회 담당자에게 닿고, 그가 사람을 상대로 체결을 내고, 그 결과가 다시 전해져야 합니다. 그 사이에 가격은 이미 움직여 있습니다. 책에는 1000주를 팔라는 주문이 입회 담당자에게 닿을 때쯤이면 가격은 더 내려가 있을 수 있다는 서술, 테이프에는 어떤 숫자가 찍혀 있어도 거래소 바닥의 진짜 가격은 104나 103일 수 있다는 서술이 나옵니다.

같은 책의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옵니다. 그 중개회사의 사무실에서 테이프는 언제나 자기에게 옛날 이야기만 들려줬다는 것입니다. 호가판 앞의 소년이 10년 동안 길러온 감각이, 숫자가 반 박자 늦게 도착하는 환경에서는 쓸 수 없는 도구가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거래량을 한 번에 던지면 던진 사람 자신이 가격을 밀어버린다는 사실도 그는 큰 돈을 다루고 나서야 배웠습니다. 작은 돈으로 작은 시장에서 통하던 것이 큰 돈으로 큰 시장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지금도 매일 반복되는 교훈입니다.

그 패배에 대한 그의 자기 진단은 꽤 혹독합니다. 자기가 철도 없이 아무 때나 거래했다는 것, 자기 방식대로 둘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냥 도박을 했다는 것, 이겨야 할 이유를 아는 대신 이기기를 바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진 것을 모두 잃는 일만큼 하면 안 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은 없다고 적었습니다. 뒷날 그의 규칙이라고 불리는 문장들은 대체로 이런 패배의 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문제는 규칙이 패배 뒤에 만들어졌는데도, 다음 패배를 막아주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1907년 공황, 그리고 모건의 전갈

1907년 가을 뉴욕은 금융공황에 빠집니다. 발단은 10월 17일, 유나이티드 코퍼의 주가가 급락한 사건이었습니다. 은행가이자 광산업자였던 F. 오거스터스 하인츠 측이 구리 시장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결과였습니다. 10월 21일 청산소협회가 니커보커 트러스트에 지원을 거절하자 이 회사 사장이 사임하고, 10월 22일 니커보커는 문을 닫았습니다. 다음 날 링컨 트러스트에도 예금 인출이 몰려 예금이 2100만 달러에서 600만 달러로 줄었습니다.

중앙은행이 없던 시절입니다. 연방준비제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이보다 6년 뒤입니다. 그래서 급한 불을 끈 사람은 민간 은행가 모건이었습니다. 10월 24일 그는 14개 은행을 불러 2355만 달러를 시장에 풀게 했고, 그때 적용된 금리는 10퍼센트에서 60퍼센트에 달했습니다. 25일에는 970만 달러가 25퍼센트에서 50퍼센트의 금리로 더 나갔고, 재무장관 조지 코텔유는 정부 자금 2500만 달러를 풀었습니다. 이 숫자들은 당시 기록으로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리버모어는 이 무너지는 시장에서 공매도를 들고 있었습니다. 공매도는 주식을 빌려 먼저 팔고 나중에 더 싸게 사서 갚는 거래, 즉 가격이 내려야 이익이 나는 베팅입니다. 그의 공매도가 단 하루에 100만 달러를 벌었다는 서술이 여러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다른 서술에서는 그 하루 이익을 300만 달러로 적습니다. 숫자가 엇갈린다는 것은, 이 시점부터 그의 손익이 공개된 회계 자료가 아니라 후대의 전기와 회고에 의존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일화가 등장합니다. 시장이 계속 무너지면 금융 시스템 자체가 멈추는 상황에서, 모건이 사람을 보내 공매도를 그만해 달라고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공매도를 접고 반등에서 다시 돈을 벌어 순자산 300만 달러에 이르렀다는 서술이 널리 인용됩니다. 다만 1907년 공황을 다룬 역사 서술들은 모건의 구제 자금과 금리, 날짜는 상세히 적으면서도 공매도 세력에게 중단을 요청한 장면은 다루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대목은 그렇게 전해진다고 적는 편이 정확합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1907년 10월이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달이라는 점입니다. 산전수전 겪은 선배 투기꾼들이 줄줄이 쓸려나간 자리에서 서른 살의 그가 돈과 평판을 함께 얻었습니다. 1934년에 그의 파산을 보도한 타임지는 그가 그 혼란에서 번 돈만큼 값나가는 평판을 얻었다고 적었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시장이 흔들릴 때마다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됩니다. 그 평판은 나중에 그에게 유리하게도, 매우 불리하게도 작용합니다.

면화에서 전부 잃다 — 자기 규칙을 자기가 어긴 대목

1907년의 승리 바로 다음에 그의 첫 번째 붕괴가 옵니다. 무대는 주식이 아니라 면화였습니다. 1908년, 그는 유명한 면화 거래자의 권유를 받아 면화를 사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리버모어에게 매수를 권하는 동안 자기 물량은 조용히 팔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책 속에서는 이 인물이 퍼시 토머스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실제 인물로는 테디 프라이스라는 이름이 거론됩니다.

여기서 그가 어긴 규칙이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는 자기가 읽은 테이프가 아니라 남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는 뒷날 남의 정보로 돈을 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적게 됩니다. 둘째, 손실이 커지는 자리에 돈을 더 넣었습니다. 그가 1940년에 책으로 정리한 규칙 중에서 가장 단호한 문장 하나가 바로 손실 난 포지션에 절대 추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908년의 그는 자기가 32년 뒤에 쓸 그 문장을 정면으로 어겼습니다.

결과는 파산이었습니다. 다만 파산의 햇수에 대해서는 자료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서술은 1912년에 약 100만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을 선언했다고 적고, 1934년 타임지는 그가 재산을 처음 잃은 것이 1915년이고 그때 스스로 파산을 선언했다고 적습니다. 두 서술 모두 그 뒤 1차 세계대전 호황기의 철강주에서 돈을 벌어 채권자들에게 갚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타임지는 2년 안에 약 200만 달러의 빚을 정리했다고 썼습니다.

회복기의 일화도 전해집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그가 조용히 면화 시장을 장악했고, 윌슨 대통령이 개입해 그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가 본전 수준에서 물량을 되팔기로 하고, 왜 그런 일을 했느냐는 물음에 할 수 있는지 보려고 했다고 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1924년과 1925년에는 밀과 옥수수에서 약 1000만 달러를 벌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시기의 숫자들도 대부분 후대의 서술에 기대어 있어 그대로 믿기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목할 것은 반복되는 모양입니다. 그는 테이프만 보고 자기 판단으로 돈을 벌었고, 그 뒤에는 거의 매번 남의 말이나 커진 자기 확신, 또는 너무 큰 베팅 크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번 돈이 커질수록 포지션이 커지고, 포지션이 커지면 같은 비율의 반대 움직임이 훨씬 큰 금액을 가져갑니다. 규칙을 아는 것과 규칙을 지키는 것 사이의 거리를, 그는 본인의 인생으로 보여줬습니다.

1929년, 숫자가 엇갈리는 가을

1929년 초, 그는 시장이 과열되었다고 보고 대규모 공매도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쉬운 길은 아니었습니다. 봄까지 장부상 손실이 600만 달러를 넘겼다는 서술이 남아 있습니다. 즉 그는 반 년 가까이 틀린 사람으로 버텼습니다. 그 뒤 10월 하순에 미국 주식시장은 역사상 손꼽히는 폭락장을 맞습니다.

이 가을의 거래로 그가 약 1억 달러를 벌었다는 서술이 가장 널리 인용됩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출처를 따라 올라가면 대부분 후대에 나온 전기와 그 전기를 인용한 글들에 닿습니다. 당시 세무 기록이나 중개회사 계좌 명세 같은 1차 자료로 이 금액이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같은 1929년을 두고 다른 서술은 수백만 달러 단위의 숫자를 적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1억 달러를 사실로 못 박지 않고, 가장 널리 전해지는 추정치라고만 적겠습니다.

확인되는 사실 쪽은 평판입니다. 폭락 직후 그는 공공의 적처럼 취급받았습니다. 주가를 떨어뜨려 돈을 번 사람이라는 비난이 쏟아졌고, 협박까지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하락에 베팅한 사람을 폭락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반응은 1929년에도, 그 뒤 거의 모든 폭락장에서도 똑같이 반복됐습니다. 참고로 공매도 세력이 폭락의 원인이었다는 주장은 이후 경제사 연구에서 폭락의 주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글의 핵심 질문이 생깁니다. 1929년에 그렇게 벌었다는 사람이 왜 5년 뒤에 파산 신청서를 쓰고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1929년 이후 그가 그 돈을 어떻게 잃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전기들도 이 부분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분명한 것은 그 가을 이후의 시장에서 그의 방식이 더 이상 돈을 벌어주지 못했다는 결과뿐입니다.

환경 변화도 겹쳤습니다. 1932년 그는 두 번째 아내와 이혼하면서 상당한 재산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1934년에는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신설되어 시장의 규칙이 달라졌습니다. 공시와 신용거래, 시세 조종에 대한 규제가 들어오면서, 소수의 큰 손이 물량으로 흐름을 만들어내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1934년 3월 7일 시카고상품거래소에서 거래 자격을 정지당합니다.

네 번째 실패 — 법정 기록이 남긴 것

1934년 3월 5일, 리버모어는 연방법원에 파산을 신청했습니다. 이 서류의 숫자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확실한 숫자입니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내용에 따르면 부채는 225만 9212달러 48센트, 자산은 18만 4000달러 수준이었습니다. 타임지는 자산을 18만 4900달러로 적고, 그 대부분이 생명보험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보도의 자산 금액이 900달러 차이가 나는데, 이런 자잘한 불일치마저 이 사람의 숫자가 늘 조금씩 흔들린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같은 보도에 이 글의 제목이 걸려 있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이 사건을 그의 네 번째 실패이자 두 번째 공식 파산이라고 적었습니다. 즉 재산을 완전히 날린 것은 네 번, 그중 법원에 서류를 내고 공식 파산한 것은 두 번이라는 구분입니다. 많은 글이 그가 네 번 파산했다고 간단히 쓰지만, 기록은 실패 네 번과 공식 파산 두 번을 구분합니다. 1934년 3월 19일자 타임지가 이 기사에 붙인 제목은 네 번째 다운이었는데, 미식축구에서 공격 기회를 다 쓴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네 번의 붕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매번 직전에 큰 승리가 있었습니다. 1907년의 승리 뒤에 면화가 있었고, 전쟁 호황의 회복 뒤에 또 한 번이 있었고, 1929년의 전설적인 승리 뒤에 1934년이 있었습니다. 이기고 나면 포지션이 커지고, 커진 포지션에서는 작은 실수가 치명적으로 변합니다. 번 돈이 다음 패배의 연료가 되는 구조를 그는 끝까지 끊지 못했습니다.

그 뒤의 몇 해는 조용합니다. 1937년 그는 80만 달러의 세금을 정리했습니다. 1939년에는 기술적 분석 체계를 판매하는 투자자문 사업을 열었습니다. 같은 해 말 아들의 권유로 책을 쓰기 시작해 1940년 3월 듀얼 슬로언 앤드 피어스에서 주식 매매하는 법을 출간했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판매는 부진했고 평은 엇갈렸습니다.

그는 1940년 11월 28일 뉴욕에서 예순세 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 글은 그 일에 대해 더 적지 않겠습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면, 그의 마지막은 투기의 결말에 대한 교훈으로 소비되기에는 너무 사적인 일입니다. 그를 평가하는 자료로 남은 것은 거래 기록과 법정 서류, 그리고 그가 남긴 문장들입니다.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 — 소설인가 전기인가

리버모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장면은 한 권의 책에서 왔습니다. 1923년에 책으로 묶여 나온 어느 주식투자자의 회상입니다. 이 책이 지금까지 100년 넘게 읽히는 트레이딩 고전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오해가 아주 널리 퍼져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것을 리버모어의 자서전이나 전기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관계는 이렇습니다. 저자는 에드윈 르페브르라는 미국 작가입니다. 리버모어 본인이 쓴 책이 아닙니다. 내용은 먼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라는 잡지에 연재물로 실렸고, 그 뒤 한 권으로 묶였습니다. 주인공의 이름도 제시 리버모어가 아니라 래리 리빙스턴입니다.

장르를 뭐라고 부를지도 분명합니다. 이 책은 실제 인물과 사건을 모델로 삼아 이름을 바꿔 쓴 소설, 이른바 실화 소설로 분류됩니다. 르페브르가 리버모어를 취재해 썼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책의 문장들은 소설가의 손을 거친 서술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가격과 금액, 대화를 역사 기록처럼 인용하면 곤란합니다. 이 글에서도 이 책에서 가져온 대목은 책에 그렇게 적혀 있다는 식으로 구분해 적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책의 값이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2008년 자기 회고록에서 이 책을 투자 지혜의 원천이라고 평했습니다. 2009년 12월에는 소설 속 인물과 실제 인물과 장소를 대조해 주석을 붙인 판본이 나왔고, 투자자 폴 튜더 존스가 서문을 썼습니다. 즉 이 책의 가치는 사실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투기하는 인간의 심리 묘사에 있습니다.

리버모어 본인이 쓴 책은 따로 있습니다. 1940년에 나온 주식 매매하는 법입니다. 시장은 틀리지 않고 틀리는 것은 사람의 의견이라는 것, 손실 난 자리에 더 넣지 말라는 것, 매일 또는 매주 꾸준히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 큰 움직임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 그 책의 문장들입니다. 이 문장들을 쓴 때가 그의 말년, 즉 그가 이미 네 번 무너진 뒤였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남은 논쟁 — 규칙인가, 생존편향인가

리버모어가 남긴 문장들은 지금도 유효할까요.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답이 있고, 둘 다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한쪽은 그의 규칙 대부분이 시장의 구조가 아니라 사람의 심리를 다루기 때문에 시대가 바뀌어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희망으로 버티지 말라,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사지 말라, 손실 난 자리에 더 넣지 말라 같은 말은 100년 전에도 지금도 똑같이 사람들이 어기는 것들입니다.

다른 쪽은 생존편향을 지적합니다. 생존편향이란, 살아남아 이름을 남긴 사례만 보고 방법이 좋았다고 결론 내리는 착각입니다. 1900년대 초 버킷샵의 손님은 수십만 명 단위였고, 1904년의 한 추산에서 그 손님들은 한 해에 약 1억 달러를 잃었습니다. 그중 숫자의 버릇을 읽는 재능으로 돈을 벌어 이름을 남긴 사람은 사실상 리버모어 한 사람입니다. 나머지 수십만 명이 같은 방법을 쓰다 조용히 사라졌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방법의 증거가 아니라 한 사람의 표본일 수 있습니다.

더 아픈 반론은 그 자신의 기록입니다. 방법이 정말로 반복 가능한 우위였다면, 그 방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네 번 전 재산을 날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가 남긴 규칙들은 대부분 손실을 겪은 뒤에 적힌 사후의 문장이고, 그는 자기 문장을 알고도 다시 어겼습니다. 1908년의 면화 거래는 남의 말을 따르지 말라와 손실에 더 넣지 말라를 동시에 어긴 사례입니다. 규칙을 아는 것이 규칙을 지키는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야말로 그의 생애가 남긴 가장 단단한 사실입니다.

환경이 달라졌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가 활동한 시장에는 공시 제도도, 증권거래위원회도, 신용거래 규제도 없었습니다. 큰 손 몇 명이 물량으로 흐름을 만들 수 있었고, 정보가 느리게 퍼졌습니다. 지금은 체결 속도가 밀리초 단위이고, 사람 눈으로 호가창을 읽는 영역의 상당 부분이 자동화된 프로그램의 영역으로 넘어갔습니다. 테이프 리딩이 정보 빈곤의 시대에 태어난 기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같은 기술이 정보 과잉의 시대에 같은 값을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남겨두는 편이 정직할 것입니다. 그의 규칙 가운데 심리와 손실 관리에 관한 부분은 지금도 읽을 값이 있고, 매매 기법에 관한 부분은 시대와 환경을 떼놓고 가져올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의 생애는 어떤 방법이 통한다는 증거로 쓰기에 적합한 자료가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네 번 무너진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리버모어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부분은 1907년의 하루와 1929년의 가을, 즉 그가 번 돈입니다. 그런데 기록으로 가장 단단하게 남은 숫자는 버는 쪽이 아니라 잃는 쪽에 있습니다. 1억 달러라는 금액은 후대의 전기를 따라 올라가다 출처가 흐려지지만, 부채 225만 9212달러 48센트는 법정 서류에 센트 단위까지 적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숫자를 기억하는지가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는 뜻입니다.

버킷샵의 구조도 곱씹을 만합니다. 적은 돈으로 큰 금액에 노출되고, 증거금이 선을 건드리면 설명 없이 정리되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수수료만큼 불리하게 시작하는 구조였습니다. 손님이 잃어야 가게가 버는 구조였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어떤 거래든 상대편이 누구인지, 어떤 조건에서 자동으로 정리되는지, 수수료와 가격 간격이 얼마나 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교훈은 100년 전과 지금이 다르지 않습니다.

같은 능력이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낸다는 점도 남습니다. 버킷샵에서 그는 10년 동안 거의 지지 않았습니다. 체결 지연이 없고 던지는 물량이 가격을 밀지 않는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정식 거래소로 옮긴 첫해에 그는 가진 것을 전부 잃었습니다. 작은 돈으로 좁은 환경에서 얻은 성적을 자기 실력의 증명으로 읽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사례입니다.

그가 남긴 것 중 가장 값진 유산은 비법이 아니라 경고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손실을 짧게 끊으라는 문장을 쓴 사람이고, 그 문장을 어겨 네 번 무너진 사람입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네 번 무너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잘 만든 규칙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몫까지 대신해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00년이 지나도 시장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변수는 가격이 아니라 가격을 보는 사람이라는 점은 그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