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을 사재기한 형제, 하루 만에 반토막 난 은값
2026-09-08 · 6분 읽기
1980년 3월 27일 목요일, 뉴욕상품거래소의 은 가격은 온스당 21.62달러에서 10.80달러로 주저앉았습니다. 하루 만에 정확히 절반이 날아간 것입니다. 그 전날까지 미국의 주요 증권사 한 곳은 특정 고객의 계좌에서 1억 2천만 달러가 넘는 돈을 받아내지 못한 상태였고, 그 고객이 끝까지 돈을 내지 못하면 증권사 자체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시장은 그날을 실버 서스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고객은 텍사스의 형제 두 사람이었습니다. 넬슨 벙커 헌트와 윌리엄 허버트 헌트. 아버지 H.L. 헌트가 석유로 쌓은 재산을 물려받은 이들은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들 가운데 꼽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는 열세 개 은행이 긴급히 모아준 11억 달러짜리 구제 대출로 간신히 숨을 쉬는 처지가 됐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전 세계 은의 상당 부분을 손에 넣었고, 어쩌다 그 많은 은을 가진 채로 파산에 이르렀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화폐에 대한 불신, 물리적인 금속을 비행기에 실어 옮긴 집착,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규칙을 바꾼 거래소가 모두 등장합니다.
형제가 금 대신 은을 택한 이유
헌트 형제의 출발점은 투기가 아니라 공포였습니다. 1970년대 미국은 물가가 해마다 두 자릿수를 넘나드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1974년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1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월급을 모아 은행에 넣어두면 앉은 자리에서 구매력이 깎여 나가는 시기였고, 종이돈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실물 자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선택은 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개인이 금덩이를 자유롭게 보유하는 일이 법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1933년부터 이어진 금 보유 금지 조치는 1975년 1월이 되어서야 풀렸습니다. 반면 은은 처음부터 아무런 제약이 없었습니다. 형제가 은으로 방향을 돌린 첫 번째 이유는 철학이 아니라 이 단순한 규제의 차이였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은이 금과 달리 실제로 쓰이는 금속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은은 사진 필름을 만드는 데 대량으로 소비됐고, 전자부품과 식기, 보석에도 들어갔습니다. 캐내는 양보다 쓰는 양이 많으면 언젠가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형제는 1970년대 초반 온스당 2달러를 밑도는 가격에 은을 모으기 시작했고, 1974년 초에는 이미 5천만 온스 안팎을 쥐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신념이 뚜렷한 장기 투자자의 모습입니다. 판단이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1970년대 은 가격은 꾸준히 올랐고, 형제의 예측은 방향 면에서 맞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벌어진 일, 즉 맞는 판단을 어떤 방식으로 실행했는가에 있었습니다.
비행기 세 대에 실어 스위스로 보낸 은
형제가 보통의 투자자와 결정적으로 달랐던 지점은 선물 계약을 다루는 방식이었습니다. 선물은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사고팔기로 미리 약속하는 계약입니다. 대부분의 투자자는 만기가 오면 계약을 다음 달로 넘기거나 차액만 정산하고 끝냅니다. 실물을 받아 창고에 쌓을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헌트 형제는 그 실물을 전부 받아냈습니다. 그리고 1979년에는 보잉 707 화물기 세 대를 전세 내 은괴를 스위스로 공수했습니다. 미국 정부가 언젠가 은마저 압류할지 모른다는 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 은이 사라지자 거래 가능한 실물이 마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가격을 끌어올리는 또 하나의 엔진이 됐습니다.
매집 규모는 1979년 들어 급격히 커졌습니다. 형제는 사우디아라비아 쪽 유력 투자자들과 함께 국제금속투자회사라는 합작 법인을 세워 자금을 보탰습니다. 이 회사의 공동 출자자 가운데는 사우디 왕실과 혼인으로 연결된 사업가 마흐무드 푸스툭도 있었습니다. 1979년 7월 말 형제가 지배하던 은은 약 1억 2,300만 온스였고, 그해 말에는 1억 9,500만 온스에 이르렀습니다. 세계 민간 보유 은의 절반을 넘는 양이라는 추정이 나왔습니다.
시장에서는 이런 행위를 매점, 영어로는 코너링이라고 부릅니다. 특정 상품의 유통 물량을 한 손에 모아 가격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시도를 말합니다. 형제는 공개적으로는 인플레이션을 피하려는 장기 보유라고 설명했지만, 거래소와 규제 당국의 눈에는 전형적인 매점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매점에는 언제나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세상의 물량을 다 가진 사람은, 정작 팔고 싶을 때 사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온스당 6달러에서 50달러로
1979년 초 온스당 6달러 수준이던 은은 그해 8월 10달러를 넘었고, 12월 31일에는 34.45달러로 한 해를 마쳤습니다. 1980년 1월 중순에는 온스당 50달러 선까지 치솟았습니다. 1년 만에 여덟 배가 오른 셈입니다. 형제의 평가이익은 수십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가격이 이 정도로 오르면 사회 전체가 반응합니다. 미국 전역에서 집에 있던 은수저와 은쟁반, 은제 액자를 들고 정련업체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할머니가 쓰던 식기 세트가 녹여져 은괴로 바뀌었습니다. 은을 원료로 쓰는 기업들에게는 반대로 재앙이었습니다. 사진 필름과 보석, 식기 제조업체의 원가가 통제 불능 상태로 뛰었습니다.
보석 브랜드 티파니는 뉴욕타임스에 광고를 내고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했습니다. 광고에는 누군가가 수십억 달러어치의 은을 사재기해 가격을 끌어올리고, 그 바람에 다른 사람들이 은제품에 터무니없는 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는 문장이 실렸습니다. 당시 이 광고가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형제의 입장은 투자자에서 정치적 표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소수의 부자가 생활물가를 흔들고 산업 원가를 뒤집어 놓는다는 인식이 퍼지면, 시장의 규칙을 만드는 쪽이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어집니다. 실제로 그 일은 몇 주 뒤에 벌어졌습니다.
거래소가 규칙을 바꾸다
1980년 1월 7일, 뉴욕상품거래소는 한 투자자가 보유할 수 있는 은 선물 계약 수를 제한하는 조치를 발표했습니다. 이른바 실버 룰 세븐으로 불리게 된 규정입니다. 동시에 증거금 요건을 크게 올렸습니다. 증거금은 선물 거래를 할 때 거래소에 미리 맡겨두는 보증금인데, 가격이 불리하게 움직이면 추가로 더 넣어야 합니다. 이 추가 요구를 마진콜이라고 부릅니다.
증거금 제도는 작은 돈으로 큰 금액을 거래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것을 레버리지, 우리말로는 지렛대 효과라고 합니다. 올라갈 때는 수익이 몇 배로 커지지만 내려갈 때는 손실도 그만큼 커지고, 무엇보다 손실이 나는 동안 계속 현금을 추가로 집어넣어야 합니다. 형제의 자산은 유정과 땅과 은괴였습니다. 당장 꺼내 쓸 현금은 그만큼 많지 않았습니다.
1월 21일 거래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은 선물에 대해 사실상 신규 매수를 막고 보유분 청산만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효과는 즉각적이었습니다. 다음 날 은 가격은 하루에 10달러 가까이 빠지며 34달러 선으로 밀렸습니다. 사려는 사람을 제도적으로 없애버린 시장에서 가격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장면이었습니다. 거래소 이사회에 은값이 떨어지면 이득을 보는 쪽 업계 인사들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은 그 뒤로도 오래 논란이 됐습니다. 다만 형제가 몰린 이유를 규칙 변경 하나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1월 이후에도 이들이 포지션을 줄이지 않고 버텼다는 데 있었습니다.
1980년 3월 27일, 실버 서스데이
3월 10일 은 가격은 29.75달러까지 내려왔습니다. 하락이 이어질수록 마진콜 금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3월 25일과 26일, 허버트 헌트는 거래 상대 증권사들에 추가 증거금을 낼 돈이 없다고 통보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곳인 베이치 핼시 스튜어트 실즈의 헌트 계좌에는 담보가 없는 미수금이 약 1억 2,200만 달러나 쌓여 있었습니다.
증권사는 담보로 잡아둔 은을 시장에 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이 더 떨어지고, 그만큼 마진콜이 더 커지고, 다시 더 많은 은이 쏟아져 나오는 악순환이 작동했습니다. 3월 27일 은은 21.62달러에서 10.80달러로 떨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은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 은 때문에 돈이 없어 무너지는 역설이 완성된 날입니다.
문제는 형제 두 사람의 손실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었습니다. 형제에게 돈을 빌려준 증권사와 은행이 연쇄적으로 흔들리면 금융 시스템 전체로 번질 수 있었습니다. 연방준비제도가 상황을 들여다보는 가운데, 열세 개 은행이 참여한 컨소시엄은 헌트 가문의 석유회사 플래시드 오일에 11억 달러를 대출해주는 방식으로 사태를 봉합했습니다.
담보로 잡힌 것은 은이 아니었습니다. 유정과 가스전, 정유시설과 송유관이었습니다. 아버지 H.L. 헌트가 평생 모은 석유 자산이 아들들의 은 투자 손실을 메우는 담보로 들어간 것입니다. 형제 세 사람은 이 대출에 개인 보증까지 섰습니다.
법정과 파산, 그리고 그 뒤
구제 대출은 시간만 벌어준 조치였습니다. 손실은 사라지지 않았고, 소송이 밀려왔습니다. 1988년 8월, 뉴욕의 배심원단은 헌트 형제와 국제금속투자회사 등이 사기와 상품거래법, 반독점법을 위반해 1979년 은 시장을 조작했다고 판단했습니다. 원고는 페루 국영 광물판매공사 민페코였고, 미국 법이 정한 배액 배상을 적용한 배상액은 1억 3천만 달러를 넘었습니다.
판결이 나온 그해 9월, 벙커와 허버트 헌트는 파산 보호를 신청했습니다. 텍사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개인 파산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습니다. 1989년에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의 합의로 1천만 달러의 벌금을 내고 상품 거래에서 영구히 배제됐습니다. 미납 세금과 이자를 정리하는 별도의 합의도 뒤따랐습니다.
벙커 헌트는 이후 경주마 사업에 남은 힘을 쏟으며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가 길러낸 경주마 가운데 중요 대회 우승마가 158마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는 2014년 10월 21일 여든여덟 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거래소와 규제 당국에게 이 사건이 남긴 숙제는 분명했습니다. 한 참여자의 포지션이 지나치게 커지면 그것 자체가 시장 전체의 위험이 되고, 그 위험은 가격이 무너지기 전에 미리 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물 시장의 포지션 한도와 대규모 보유자 보고 제도는 상당 부분 이 시기의 경험 위에 세워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헌트 형제는 방향을 틀리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화폐 가치가 깎여 나갈 것이라는 전망도, 은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전망도 결과적으로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무너졌습니다. 맞는 판단과 살아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이 사건은 가장 비싼 방식으로 보여줍니다.
무너진 이유는 세 가지로 모아집니다. 빌린 돈으로 산 자산은 가격이 내릴 때 현금을 요구한다는 것, 시장의 규칙은 영원하지 않고 특히 소수가 시장을 지배할 때 바뀐다는 것, 그리고 너무 많이 가진 자산은 파는 순간 자기 손으로 가격을 깎는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가장 잔인합니다. 내가 가진 양이 시장 전체에 비해 클수록, 내가 세운 출구 계획은 실행하는 순간 무효가 됩니다.
2021년 게임스탑 사태 때 많은 사람들이 1980년의 은 시장을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참여자와 규모와 수단은 완전히 달랐지만, 집중된 매수세가 가격을 밀어 올리고 거래 제한 조치가 들어오면서 흐름이 꺾이는 구조는 비슷했습니다. 사재기로 가격을 만들어낸 시장은 결국 그 사재기가 멈추는 순간을 견디지 못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세계 은의 절반을 살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이야기에서 가져올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자산이든 들어갈 때 나올 길을 함께 생각해 두었는가, 그리고 가격이 반대로 움직이는 동안 추가로 돈을 넣어야 하는 구조에 들어가 있지는 않은가. 1980년 3월의 그 목요일이 지금도 자주 인용되는 이유는, 바로 이 두 질문이 46년이 지나도 전혀 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