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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에 묶인 돈은 왜 위기를 못 막았나

1925년 4월 28일 런던 하원, 재무장관 윈스턴 처칠이 예산 연설 중에 한 문장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영국이 파운드화를 다시 금에 묶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것도 전쟁 전과 똑같은 1파운드당 4.86달러라는 환율로 돌아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석에서는 환호가 터졌습니다. 세계대전으로 흐트러졌던 대영제국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는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한 문장은 이후 6년 동안 영국의 수출을 갉아먹었고, 탄광 노동자의 임금을 깎게 만들었고, 1926년 총파업이라는 사회적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931년 9월, 영국은 스스로 금본위제를 내던졌습니다. 세계의 표준을 만들어낸 나라가 그 표준을 가장 먼저 포기한 셈이었습니다.

금본위제는 화폐 한 단위의 가치를 정해진 양의 금에 고정해두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정부가 이 지폐를 가져오면 언제든 금 얼마로 바꿔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듣기에는 든든합니다. 정치인이 마음대로 돈을 찍어낼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든든함이 위기 때는 치명적인 족쇄가 됩니다.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그 하나입니다. 금에 묶여 있으면, 정작 돈이 필요한 순간에 돈을 풀 수 없습니다.

영국에서 시작해 세계로 퍼진 표준

출발은 의외로 허술했습니다. 1717년 영국 조폐국장이던 아이작 뉴턴이 금과 은의 공식 교환 비율을 정했는데, 결과적으로 금의 값을 다소 높게 매겼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싸게 매겨진 은을 영국 밖으로 내다 팔았고, 영국 안에는 금만 남았습니다. 영국은 이 상태를 1821년에 법으로 굳혔습니다. 파운드는 금으로만 교환되는 화폐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있었고, 런던은 세계 무역의 결제와 금융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은 1871년 독일에서 일어났습니다.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긴 독일제국은 배상금으로 받은 막대한 금을 바탕으로 새 통화 마르크를 금본위제로 출범시켰습니다. 유럽의 큰 경제 하나가 은을 버리고 금으로 옮겨가자 연쇄 반응이 시작됐습니다.

프랑스가 1870년대 후반에 뒤따랐고, 미국은 남북전쟁 뒤 중단했던 금태환을 1879년에 재개한 다음 1900년 금본위제법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일본과 러시아는 나란히 1897년에 합류했습니다. 1913년 무렵에는 주요 경제국 대부분이 금을 기준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명령한 적도, 국제 조약을 맺은 적도 없었습니다. 각자 이익을 따져 같은 쪽으로 걸어갔을 뿐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모두가 금을 쓰면 환율이 사실상 고정됩니다. 파운드가 금 얼마, 마르크가 금 얼마로 정해져 있으니 두 화폐 사이의 교환 비율도 자동으로 정해집니다. 환율이 흔들리지 않으면 수출업자는 마음 놓고 계약하고, 투자자는 안심하고 국경을 넘어 돈을 보냅니다. 19세기 후반에 무역과 자본 이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배경에는 이 보이지 않는 공통 규칙이 있었습니다.

대신 각 나라는 값비싼 것을 하나 내놓아야 했습니다. 자기 나라 사정에 맞춰 금리를 조절하고 돈의 양을 늘리는 권한, 즉 오늘날 우리가 통화정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금이 빠져나가면 금리를 올려 붙잡아야 했고, 그 바람에 경기가 식어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국내 경기보다 금고 안의 금이 우선이었습니다.

1914년, 각국이 조용히 금고 문을 닫았다

이 체제는 1914년 여름에 사실상 끝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참전국들은 줄줄이 금태환을 멈췄습니다. 이유는 뻔했습니다. 전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돈을 먹는데, 금에 묶여 있으면 그 돈을 찍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쟁이라는 비상사태 앞에서 금본위제는 가장 먼저 치워야 할 장애물이었습니다.

각국은 국채를 찍고 중앙은행이 그것을 받아주는 방식으로 전쟁 비용을 댔고, 물가는 나라마다 다른 속도로 뛰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의 물가 수준은 전쟁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전쟁 전의 정상이라는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920년대 내내 각국 정책 당국자들이 매달린 목표가 바로 그 정상으로의 복귀였습니다. 금본위제로 돌아가는 것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국가의 체면이자 신용의 증명처럼 받아들여졌습니다. 문제는 물가가 이미 달라졌는데 옛날 환율로 돌아가려 했다는 점입니다. 몸은 변했는데 예전 옷을 그대로 입겠다고 고집한 셈이었습니다.

1925년 영국, 옛 환율로 돌아가는 고집

영국의 선택이 가장 상징적이었습니다. 영란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을 비롯한 금융가들은 전쟁 전 평가인 1파운드당 4.8665달러로의 복귀를 강하게 밀어붙였습니다. 런던이 다시 세계 금융의 중심이 되려면 파운드의 가치가 옛날 그대로여야 한다는 논리였습니다. 신뢰는 숫자를 지킬 때 생긴다는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반대편에는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물가와 임금 수준을 감안하면 그 환율이 파운드를 10% 가까이 비싸게 매기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화폐가 비싸지면 수출품 가격도 함께 비싸집니다. 결국 수출로 먹고사는 산업이 그 부담을 임금 삭감으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처칠은 복귀를 택했습니다. 케인스는 그해에 처칠씨의 경제적 귀결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이 결정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측은 거의 그대로 현실이 됐습니다. 영국의 석탄과 섬유는 국제 시장에서 밀려났고, 탄광주들은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연장을 요구했습니다. 1926년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터진 배경에는 이 환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금본위제의 잔인한 작동 원리가 드러납니다. 환율을 내릴 수 없으면 조정은 사람의 임금과 일자리로 갑니다. 화폐 가치를 낮춰 경쟁력을 되찾는 길이 막혀 있으니, 남은 방법은 국내 비용을 깎는 것뿐입니다. 경제학에서 이를 내부 평가절하라고 부르는데, 글로 쓰면 한 줄이지만 현실에서는 임금 삭감과 실업을 뜻합니다.

1931년, 사슬을 먼저 끊은 나라가 먼저 살아났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되자 금본위제는 위기를 완화하는 장치가 아니라 증폭하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은행이 무너지고 물가가 떨어질 때 중앙은행이 해야 할 일은 돈을 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본위제 아래서는 반대로 해야 했습니다. 금이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려면 오히려 금리를 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1931년 5월 오스트리아 최대 은행 크레디트안슈탈트가 무너지면서 위기는 중부 유럽으로 번졌고, 여름에는 독일 은행들이 문을 닫았습니다. 다음 차례는 파운드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금을 지키기 위해 재정 긴축에 나섰고, 공무원과 군인의 급여까지 깎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1931년 9월 15일과 16일, 스코틀랜드 인버고든에 정박해 있던 영국 해군 함정에서 수병들이 급여 삭감에 항의해 근무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일부 계층은 삭감 폭이 25%에 달했습니다. 세계 최강 해군에서 항명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시장에 영국이 통제력을 잃었다는 신호로 읽혔습니다. 파운드 인출이 폭주했고, 9월 21일 영국은 금본위제를 포기했습니다.

파운드는 곧바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영국 경제는 그때부터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금리를 내릴 수 있게 되자 주택 건설이 살아났고, 싸진 파운드 덕에 수출도 숨통이 트였습니다. 재앙이라던 이탈이 사실은 회복의 출발점이었던 것입니다.

이탈 경쟁, 그리고 끝까지 버틴 나라들

영국의 이탈은 신호탄이었습니다. 수십 개 나라가 뒤를 따랐고, 금본위제는 지키는 제도가 아니라 언제 버릴지 서로 눈치를 보는 제도가 되었습니다. 먼저 버리는 나라가 이득을 보는 구조였으니 이탈은 경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1933년에 움직였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해 4월 5일 행정명령 6102호로 민간의 금 보유를 사실상 금지해 금을 정부로 모았고, 1934년 1월 30일 금준비법에 서명하며 금 1온스의 공식 가격을 20.67달러에서 35달러로 올렸습니다. 달러의 금 가치를 이전의 59% 수준으로, 즉 40% 넘게 낮춘 조치였습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금블록 국가들은 끝까지 버텼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금에 묶인 채 물가 하락과 불황을 고스란히 견뎌야 했고, 결국 1936년에야 금에서 손을 뗐습니다. 여러 연구가 같은 결론을 가리킵니다. 대공황에서 먼저 빠져나온 나라는 금을 먼저 버린 나라였습니다.

경제사학자들은 이 상황을 황금 족쇄라고 부릅니다. 금은 평온한 시기에는 신뢰를 주는 닻이지만, 폭풍이 오면 배를 바닥에 묶어두는 쇠사슬이 된다는 뜻입니다. 1930년대의 세계는 그 쇠사슬을 누가 먼저 끊느냐로 운명이 갈렸습니다.

왜 고정된 약속은 결국 터지는가

금본위제의 붕괴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 결과였습니다. 국제 금융에는 세 가지를 동시에 가질 수 없다는 유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환율을 고정하는 것,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는 것, 그리고 자기 나라 경기에 맞춰 금리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이 셋 중 둘까지는 가능하지만 셋을 다 가질 수는 없습니다.

금본위제는 앞의 두 가지를 택하고 세 번째를 포기한 체제였습니다. 평상시에는 그 포기가 별로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공황처럼 국내 경제가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포기했던 그 세 번째가 바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도구였습니다.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쓸 수 없는 도구, 그것이 금본위제의 딜레마였습니다.

게다가 금의 총량은 인간이 마음대로 늘릴 수 없습니다. 세계 경제와 교역량은 계속 커지는데 금 생산량은 광산 사정에 달려 있습니다. 돈의 양이 경제 규모를 따라가지 못하면 물가는 아래로 향합니다. 물가가 계속 떨어지면 빚의 실질 부담이 무거워지고, 기업과 가계는 소비와 투자를 미룹니다. 1930년대에 세계가 겪은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금과 달러를 연결하고 다른 통화를 달러에 묶는 방식으로 금의 그림자가 남았습니다. 그리고 1971년 8월, 미국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교환을 중단한다고 발표하면서 그 마지막 끈마저 끊어집니다. 다만 1971년은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기보다, 1914년에 시작되어 1931년에 결정적으로 무너진 흐름의 마지막 장면에 가깝습니다.

금본위제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금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닙니다. 어떤 제도든 규율과 유연성을 동시에 최대치로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규율이 강한 제도는 평온할 때 신뢰를 주지만 위기 때 대응 수단을 빼앗습니다. 유연한 제도는 위기 때 강력하지만 평온할 때 절제를 요구합니다. 어느 쪽이든 공짜는 없습니다.

또 하나, 정책 당국이 체면과 상징을 위해 경제 현실을 거스를 때 그 비용은 결국 숫자가 아니라 사람에게 간다는 점입니다. 1925년 영국이 지킨 것은 4.86달러라는 숫자였고, 그 대가를 치른 것은 탄광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시장을 보는 우리 입장에서 기억할 것은 이것입니다. 정부나 중앙은행이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선언한 환율이나 가격이 경제의 실제 체력과 어긋나 있다면, 그 선언은 시간이 문제일 뿐 언젠가는 수정됩니다.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것은 약속의 강도가 아니라 그 약속을 지탱하는 현실의 힘입니다. 발표문의 단호한 문구보다 그 아래에 깔린 조건을 들여다보는 습관이, 투자자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