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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한 줌과 제국의 회계장부

19세기 영국령 인도의 한 기록은 연간 35루피를 버는 노동자의 사정을 이렇게 계산해 놓았습니다. 그가 가족과 함께 1년에 소금 24시어, 약 22킬로그램을 먹는다면 소금세로 2루피 7안나를 내게 됩니다. 소득의 7.5퍼센트입니다. 소득세라는 제도를 구경한 적도 없는 사람이, 밥에 뿌리는 소금 때문에 7.5퍼센트의 세금을 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인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입니다. 해안에서 바닷물을 퍼다 끓이면 누구나 소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82년 제정된 인도 소금법은 소금의 채취와 제조를 정부 독점으로 묶었습니다. 인도인이 자기 집 앞 해변에서 소금을 긁어모으는 행위가 범죄가 된 것입니다. 생산 수단은 눈앞에 있는데 법이 그것을 막고 있는 상태, 그것이 소금세의 본질이었습니다.

1930년 마하트마 간디가 대영제국에 맞설 불복종 운동의 표적으로 고른 것이 바로 이 소금세였습니다. 거창한 정치 구호도, 헌법도, 참정권도 아니었습니다. 왜 소금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려면 소금세가 어떤 세금이었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조세가 아니라, 제국의 재정과 통치 정당성이 동시에 걸려 있는 급소였습니다.

2,500마일의 울타리

영국의 소금 과세는 1930년에 갑자기 생긴 제도가 아닙니다. 기록에 따르면 1780년 무렵 소금 1마운드, 약 37킬로그램의 가격이 2루피였고 거기에 붙는 세금이 1.1루피에서 1.5루피였습니다. 1788년부터는 세금이 3.25루피로 올랐고, 도매가격은 1.25루피에서 4루피 수준으로 뛰었습니다. 바닷물을 끓이면 나오는 물질에, 물건값보다 큰 세금이 붙은 것입니다.

세금을 걷으려면 밀매를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 내륙에 관세선을 세웠습니다. 1840년대부터 조성된 이 방벽은 가시나무를 심어 만든 거대한 생울타리였는데, 인도 대울타리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1869년 시점의 기록은 이 관세선이 인두스강에서 마하나디강까지 인도 전체를 가로질러 2,300마일에 걸쳐 뻗어 있었고, 1만 2천 명에 가까운 경비원과 하급 관리가 지켰다고 적고 있습니다. 최대 길이는 2,500마일까지 늘어났습니다.

소금이 제국 재정에서 차지한 비중은 작지 않았습니다. 1858년 기준으로 소금 독점은 영국령 인도 총수입의 10퍼센트를 담당했습니다. 1880년 소금 수입은 700만 파운드에 달했습니다. 1882년 인도 소금법이 정한 세율은 1마운드당 1루피 4안나였습니다. 소금 행진이 벌어진 무렵에도 소금세는 영국령 인도 조세 수입의 8.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인도 민족운동 진영은 이 세금을 오래전부터 공격해 왔습니다. 1885년 인도국민회의 초기 회의에서 S. A. 스와미나타 아이야르는 소금이 인간과 가축 모두에게 필수적인 물품이며 세율 인상은 민중에게 무겁게 떨어질 것이라고 반대했습니다. 1894년 다다바이 나오로지는 소금세를 두고 어떤 문명국도 부과한 바 없는 가장 잔인한 조세라고 비난했습니다. 간디가 1930년에 발견한 것이 아니라, 반세기 동안 쌓여 있던 분노였습니다.

왜 하필 소금이었을까

1930년 간디가 소금을 표적으로 지목했을 때 동료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의아하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제국과 싸우는데 왜 동네에서 파는 소금을 걸고넘어지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간디의 판단에는 분명한 계산이 있었습니다. 소금은 종교와 카스트와 계급을 가로지르는 거의 유일한 상품이었습니다. 힌두교도든 이슬람교도든, 지주든 날품팔이든 매일 먹어야 했습니다.

더운 기후에서 하루 종일 몸을 쓰는 사람에게 소금은 기호품이 아니라 생존 조건입니다. 땀으로 염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금세는 가난한 사람에게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세금이었습니다. 소비량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소득은 천지차이였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본 7.5퍼센트라는 계산이 바로 그 구조를 보여줍니다.

간디가 고른 저항 방식도 치밀했습니다. 소금법을 어기는 데는 무기도, 조직도, 돈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해변에 가서 소금을 집어 들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3억 인구가 동시에 따라 할 수 있는 위법 행위였던 셈입니다. 식민 당국은 그 모두를 체포할 수 없었고, 체포하지 않으면 법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간디는 행동에 앞서 총독 어윈 경에게 서신을 보내 소금세 폐지를 포함한 요구 사항을 제시했습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계획대로 행진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겨눈 것이 세율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세금이라는 제도가 통치받는 사람들의 동의 위에 서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시험하려 했습니다. 경제 문제를 정치 문제로 전환하는 작업이었습니다.

387킬로미터, 24일

1930년 3월 12일, 61세의 간디는 아흐메다바드의 사바르마티 아슈람을 출발했습니다. 동행한 사람은 78명이었고, 지역과 카스트와 종교가 서로 다른 구성이었습니다. 목적지는 구자라트 나브사리 지구의 해안 마을 단디였습니다. 거리는 387킬로미터, 240마일이었습니다. 자동차도 기차도 쓰지 않고 걷기로 한 것은 고행이 아니라 구경거리를 만들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행진은 24일간 이어졌습니다. 간디는 지나는 마을마다 멈춰 소금세의 부당함을 설명했고, 길가에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국과 유럽의 특파원들이 이 느린 행렬을 밀착 취재했습니다. 하루 20킬로미터 남짓 걷는 노인의 일정은 기사를 쓰기에 완벽했습니다. 매일 같은 이야기가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에 반복해서 실렸고, 도착 전부터 긴장이 쌓였습니다.

1930년 4월 6일 오전 8시 30분, 단디 해변에서 간디는 바닷물에 젖은 흙을 끓여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법적으로 범죄였습니다. 그가 그 자리에서 한 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나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흔들고 있습니다. 한 줌의 소금과 한 문장이 세계 신문의 1면으로 갔습니다.

그다음은 간디도 통제할 수 없는 규모로 번졌습니다. 인도 전역의 해안에서 사람들이 직접 소금을 만들고, 도시에서는 그 소금을 팔았습니다. 식민 당국은 결국 간디를 체포했습니다. 체포는 5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이루어졌고, 재판 없이 구금할 수 있는 1827년의 낡은 규정이 적용됐습니다. 그달 말까지 체포된 인도인은 6만 명을 넘었습니다.

다라사나, 1930년 5월 21일

간디가 구금된 뒤 운동을 이어받은 것은 76세의 전직 판사 아바스 티얍지였고, 그가 체포된 뒤에는 시인 사로지니 나이두가 지휘를 맡았습니다. 간디의 아내 카스투르바 간디도 현장에 가려다 체포되어 3개월 형을 받았습니다. 목표는 정부 소유의 다라사나 소금 공장이었습니다. 1930년 5월 21일, 약 2,500명의 비폭력 시위대가 공장으로 향했습니다.

출발 전 나이두가 시위대에게 준 지시는 간결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을 쓰지 말 것, 맞겠지만 저항하지 말 것, 손을 들어 매를 막지도 말 것이었습니다. 공장 앞에는 끝에 쇠를 박은 곤봉 라티를 든 경찰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시위대는 줄을 지어 조용히 걸어 들어갔습니다. 경찰은 머리와 어깨를 내리쳤습니다.

현장을 취재한 미국 기자 웹 밀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행진자 가운데 단 한 명도 매를 막으려고 팔을 들지 않았다. 그들은 볼링 핀처럼 쓰러졌다. 땅은 몸으로 누벼져 있었다. 앞줄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면 다음 줄이 걸어 나왔습니다. 이날의 공식 집계는 사망 2명, 부상 320명이었습니다.

영국 전신 담당자들은 밀러의 기사를 처음에 검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기사는 결국 세계로 나갔고, 1,350개 신문에 실렸습니다. 미국에서는 상원의원 존 J. 블레인이 이 기사를 상원 의사록에 낭독해 공식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제국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활자로 세계에 공개된 셈입니다. 이것은 간디가 행진을 느리게 설계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세금은 없어졌을까요

1931년 3월 5일 간디와 어윈 총독 사이에 협정이 체결됐습니다. 영국은 폭력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정치범을 즉시 석방하고, 아직 징수하지 않은 벌금을 면제하고, 제3자에게 매각되지 않은 압류 토지를 돌려주기로 했습니다. 해안 마을 주민이 자기 소비용 소금을 만들 권리도 인정했습니다. 평화적 피케팅 권리를 보장하고 비상 법령을 철회하는 조항도 들어갔습니다.

간디 쪽은 시민불복종 운동을 중단하고 원탁회의에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영국이 받아들이지 않은 요구도 있었습니다. 경찰 폭력에 대한 공개 조사와 바가트 싱의 사형 감형은 거부됐습니다. 이 협정은 인도가 식민 당국에서 끌어낸 최초의 공식적인 양보로 평가되지만, 양쪽 모두 얻은 것보다 미룬 것이 많은 타협이었습니다.

여기서 꼭 짚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소금세 자체는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허용된 것은 해안 마을 주민이 자기가 먹을 소금을 만드는 것뿐이었고, 판매는 여전히 금지였습니다. 회계장부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1929년에서 1930년 회계연도의 소금 수입은 6,700만 루피였는데, 1932년에서 1933년에는 1억 200만 루피로 오히려 늘었습니다. 숫자만 보면 제국은 이 싸움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경제적 타격은 다른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영국산 제품 불매 운동으로 외국산 의류와 담배 수입이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토지세와 주세 수입도 감소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제국을 재정적으로 무너뜨릴 규모는 아니었습니다. 소금 행진의 승리는 장부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통치의 정당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항목에서 일어났습니다.

소금세가 실제로 사라진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1946년 4월 6일, 간디는 소금 행진 16주년에 맞춰 세금 폐지를 요청했고 재무 담당자 아치볼드 로울랜즈 경이 폐지 명령을 냈습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총독 웨이벌 경이 막았습니다. 소금세는 1947년 3월 임시정부에서 재무장관 리아콰트 알리 칸이 폐지했습니다. 간디가 소금을 집어 든 날로부터 17년이 지난 뒤였고, 인도 독립 직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소금 행진이 보여주는 첫 번째 사실은 세금이 회계 문제이기 전에 정치 문제라는 점입니다. 생필품에 매긴 세금은 가장 넓고 얇게 퍼지기 때문에 저항이 적을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이 매일 체감합니다. 세율 몇 퍼센트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왜 이것을 걷을 자격이 있는지를 매일 묻게 만드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두 번째는 숫자와 정당성의 간극입니다. 소금 수입은 운동 기간에도 늘었고 제국의 재정은 버텼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식민 통치의 전환점으로 기록됩니다. 어떤 제도가 무너질 때 먼저 금이 가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그 제도를 지탱하던 사람들의 동의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장부가 멀쩡해 보이는 동안에도 바닥은 이미 갈라져 있을 수 있습니다.

제도와 규칙을 보는 눈에 이 이야기가 남기는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거대한 시스템은 그것을 떠받치는 다수가 계속 그 규칙을 받아들여 줄 때만 유지됩니다. 그 동의가 흔들리는 신호는 보통 재무제표보다 먼저 나타나고, 뒤늦게 숫자로 확인됩니다. 한 노인이 해변에서 집어 든 소금 한 줌이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그 신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장면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