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분 만에 1조 달러가 사라진 날
2026-09-20 · 7분 읽기
2010년 5월 6일 오후 2시 42분, 뉴욕 증권거래소 객장의 화면들이 일제히 붉게 물들었습니다.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가 몇 분 사이에 1,000포인트 가까이 수직으로 빠졌습니다. 그날 고점과 저점의 차이는 1,010포인트가 넘었고, 장부상으로 약 1조 달러에 해당하는 시가총액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더 기이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졌습니다.
20분쯤 뒤, 지수는 거의 원래 자리로 되돌아와 있었습니다. 전쟁이 난 것도, 대형 은행이 무너진 것도, 중앙은행이 무슨 발표를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다는 시장이 아무 이유 없이 무너졌다가 아무 이유 없이 회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훗날 플래시 크래시라는 이름이 붙은 사건입니다.
그날의 36분은 이후 시장 제도를 바꿔놓았습니다. 누군가 시장을 무너뜨렸다는 음모론과, 아무도 잘못한 사람이 없다는 해명 사이에서 규제당국은 5개월에 걸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드러난 것은 악당의 얼굴이 아니라, 우리가 유동성이라고 부르던 것의 정체였습니다.
그날 아침부터 시장은 이미 예민했습니다
5월 6일 아침의 분위기는 이미 좋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재정 위기가 유럽 전체로 번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몇 주째 시장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의회 앞에서는 긴축 반대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고, 유로화는 달러 대비 약세였습니다. 개장 직후부터 미국 주요 지수는 서서히 밀리고 있었고, 변동성을 나타내는 지표도 평소보다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오후 2시가 지나면서 하락 폭이 커졌습니다. 이때 시장에는 이미 매수 주문이 평소보다 얇게 깔려 있었습니다. 주문이 얇다는 것은 지금 당장 사겠다고 대기 중인 물량이 적다는 뜻이고, 같은 크기의 매도 물량이 나와도 가격이 훨씬 크게 밀린다는 뜻입니다. 화약고는 그렇게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오후 2시 32분, 캔자스의 자산운용사 워들 앤드 리드가 주가지수 선물을 대량으로 파는 주문을 넣었습니다. 대상은 E미니 S&P500 선물 75,000계약, 금액으로는 약 41억 달러 규모였습니다. 선물이란 미래의 특정 시점에 정해진 가격으로 사고팔기로 미리 약속하는 계약을 말합니다. 이 회사는 보유 주식의 하락 위험을 줄이려고 선물을 판 것이었고, 그 자체는 흔한 거래였습니다.
문제는 주문을 집행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회사가 쓴 프로그램은 직전 1분 동안의 거래량 가운데 9퍼센트만큼씩을 계속 팔아치우도록 설정되어 있었습니다. 가격이 얼마든,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하지 않는 설정이었습니다. 시장이 활발할 때는 무난한 방식이지만, 바로 이 설정이 그날 오후 치명적인 되먹임 고리를 만들어냅니다.
유동성이 증발한다는 말의 진짜 의미
매물이 쏟아지자 처음에는 고빈도 매매 회사들이 받아냈습니다. 고빈도 매매란 컴퓨터가 1초에도 수백 수천 번씩 주문을 내고 취소하면서 아주 작은 가격 차이를 반복해서 먹는 거래 방식을 말합니다. 이들은 평소 시장에 사자 주문과 팔자 주문을 촘촘히 깔아두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한동안 시장의 윤활유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사들인 선물 물량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불어나자, 프로그램은 위험을 줄이라는 명령에 따라 방금 산 물량을 다시 시장에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그 매도는 거래량으로 잡혔고, 워들 앤드 리드의 프로그램은 거래량이 늘어난 만큼 매도 속도를 더 높였습니다. 파는 쪽이 파니까 또 팔게 되는 구조였습니다.
조사 보고서는 이 장면을 뜨거운 감자 돌리기에 비유했습니다. 오후 2시 45분 13초부터 27초까지 단 14초 동안 고빈도 매매 회사들끼리 주고받은 계약은 2만 7천 건이 넘었습니다. 그 시간 전체 거래량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였지만, 실제로 순매수한 물량은 200계약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거래는 폭발적으로 늘었는데 정작 물량을 떠안아주는 주체는 없었습니다.
이때 시장에 남아 있던 매수 대기 물량은 그날 아침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까지 말라버렸습니다. 유동성이 증발한다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라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사겠다는 주문이 사라진 시장에서 매도 주문은 걸려 있는 아무 가격에나 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도 체결될 거라 생각하지 않고 걸어둔 주문들이 있었습니다.
1센트에 팔리고 10만 달러에 팔린 주식들
그날 오후 컨설팅 회사 액센츄어의 주식은 주당 1센트에 체결됐습니다. 전기·가스 회사 센터포인트 에너지를 비롯해 S&P500에 속한 대형 기업 여덟 곳의 주식이 1센트라는 값에 팔려나갔습니다. 회사가 망한 것도 아니고 아무 공시도 없었는데, 단 몇 초 동안 그 기업의 주식 한 주 값이 동전 한 닢이 되었습니다.
반대 방향으로도 일이 벌어졌습니다. 경매회사 소더비, 애플, 휴렛팩커드 같은 종목은 순간적으로 주당 10만 달러가 넘는 가격에 체결됐습니다. 이런 황당한 체결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른바 스텁 쿼트 때문이었습니다. 스텁 쿼트란 시장을 만드는 역할을 맡은 회사들이 의무를 형식적으로 채우기 위해, 절대 체결될 리 없다고 생각하는 터무니없는 가격에 걸어두는 형식적인 호가를 말합니다.
정상적인 호가가 모두 사라지자, 시장에 남은 것은 그 형식적인 호가뿐이었습니다. 시장가 주문은 값을 따지지 않고 지금 있는 상대방과 체결되는 주문이기 때문에, 그 터무니없는 가격에 그대로 붙었습니다. 특히 손실을 제한하려고 걸어둔 손절 주문들이 줄줄이 시장가 주문으로 바뀌면서 1센트에 팔려나갔습니다. 위험을 막으려고 걸어둔 장치가 오히려 최악의 가격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후 2시 45분 28초, 시카고상품거래소의 자동 안전장치가 작동해 E미니 선물 거래를 5초 동안 멈춰 세웠습니다. 겨우 5초였습니다. 그 5초 사이에 주문이 다시 쌓였고, 2시 45분 33초에 거래가 재개되자 가격은 곧바로 반등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3시 8분 무렵에는 선물 가격이 급락 직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습니다.
2만 건의 거래를 없던 일로
장이 끝난 뒤 거래소와 미국 금융산업규제기구는 전례 없는 조치를 내렸습니다. 오후 2시 40분 기준 가격에서 60퍼센트 이상 벗어난 가격에 체결된 거래를 무효로 돌린 것입니다. 그 대상이 300개가 넘는 종목에서 2만 건이 넘었습니다. 이미 체결된 거래를 사후에 없던 일로 만드는 조치는 시장 신뢰의 근간을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곧바로 논란이 됐습니다. 60퍼센트라는 기준선이 어떤 근거로 정해졌는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59퍼센트 손해를 본 사람은 그대로 손실을 떠안았고, 61퍼센트 손해를 본 사람은 구제를 받았습니다. 그 사이에 걸린 개인투자자들에게 이 선긋기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는 2010년 9월 30일, 약 5개월에 걸친 합동 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결론은 시장을 무너뜨리려는 악의적 세력은 없었고, 커진 매도 압력과 자동화된 주문 프로그램들이 서로를 자극하며 유동성이 순식간에 말라버린 구조적 사고였다는 것이었습니다.
5년 뒤, 런던 교외에서 걸려온 전화
사건이 묻히는 듯했던 2015년 4월, 영국 런던 교외 하운즐로에 사는 한 남성이 미국 당국의 요청으로 체포됐습니다. 나빈더 싱 사라오. 부모 집에서 혼자 컴퓨터로 선물을 거래하던 트레이더였습니다. 미국 법무부는 그를 사기와 시세조종 등 여러 혐의로 기소했고, 그의 거래가 플래시 크래시 당일 시장 불안을 키웠다고 봤습니다.
그의 수법은 스푸핑이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스푸핑이란 실제로 체결시킬 생각이 없는 대량의 주문을 걸어 시장에 가짜 수요나 공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다른 참가자들이 그에 반응해 가격이 움직이면 주문을 취소하고 반대쪽에서 이익을 챙기는 행위입니다. 검찰은 그가 이런 주문을 걸었다가 수정하거나 취소한 횟수가 수만 번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사라오는 2016년 11월 전신사기와 스푸핑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습니다. 미국 법무부는 그가 이런 거래로 최소 1,280만 달러의 이익을 얻었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그가 플래시 크래시의 유일한 원인이었느냐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남아 있습니다. 5개월간의 합동 조사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020년 1월, 미국 법원은 그에게 징역형 대신 1년간의 가택 구금을 선고했습니다. 이례적으로 가벼운 처분이었습니다. 수사에 적극 협조했다는 점, 번 돈을 과시적으로 쓰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을 받았다는 점이 고려됐습니다. 세계 최대 시장을 흔든 혐의로 기소된 인물의 마지막 장면은 감옥이 아니라 부모 집의 방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시장에 생긴 브레이크
가장 먼저 도입된 것은 종목별 서킷브레이커였습니다. 그전까지 미국 시장의 안전장치는 지수 전체가 크게 빠졌을 때만 작동했습니다. 개별 종목 하나가 5분 만에 반토막이 나도 멈춰 세울 장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2010년 6월부터 S&P500 종목이 5분 안에 10퍼센트 넘게 오르거나 내리면 5분간 거래를 멈추는 규칙이 시범 도입됐습니다.
같은 해 11월에는 스텁 쿼트가 금지됐습니다. 시장 조성 역할을 하는 회사는 현재 시세에서 합리적인 범위 안에만 호가를 내도록 의무화한 것입니다. 1센트짜리 체결을 만들어낸 구멍을 직접 틀어막은 조치였습니다. 이어 2012년에는 종목별 가격 제한 대역을 촘촘하게 설정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정교해졌습니다.
거래 기록을 추적하는 체계도 만들어졌습니다. 조사 당시 규제당국이 가장 곤혹스러워한 것은, 수많은 거래소에 흩어진 주문 기록을 한데 모아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재구성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문의 생성부터 취소와 체결까지 전 과정을 한 곳에서 추적하는 통합 감사 기록 체계가 추진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플래시 크래시가 남긴 가장 불편한 사실은, 그날 명백한 악당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대량 매도를 낸 운용사는 위험을 줄이려 했을 뿐이고, 고빈도 매매 회사들은 자기 손실을 막으려 했을 뿐이며, 손절 주문을 걸어둔 개인투자자들은 위험을 관리하려 했을 뿐입니다. 각자 합리적으로 움직인 결과가 겹쳐서 시장 전체를 무너뜨렸습니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유동성의 성질입니다. 평소 시장에는 언제든 사고팔 수 있을 만큼 상대방이 충분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상대방의 상당수는 아주 짧은 시간만 위험을 떠안는 참가자들이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 가장 먼저 사라집니다. 팔고 싶을 때 언제든 팔 수 있다는 전제는 대체로 맞지만, 항상 맞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그날의 교훈은 특정한 거래 기법을 피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시장에 남겨둔 주문이 아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어떤 값에 체결될 수 있는지를 한 번쯤 그려보는 일에 가깝습니다. 시장은 대부분의 날에 정상적으로 작동하지만, 2010년 5월 6일 오후의 36분처럼 그렇지 않은 시간도 존재합니다. 그 36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꽤 다른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