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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사냥으로 위장한 열흘, 연준의 탄생

1907년 10월 하순의 어느 토요일 새벽 세 시, 뉴욕 매디슨가에 있는 한 개인 서재에 은행과 신탁회사 임원 120명가량이 모여 있었습니다. 집주인은 일흔 무렵의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안으로 들인 뒤 문을 잠그고 열쇠를 자기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합의가 나오기 전에는 아무도 이 방을 나갈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새벽 네 시 사십오 분경, 지쳐 버린 신탁회사 대표들은 2,500만 달러를 함께 내놓겠다는 서류에 마침내 서명했습니다.

그 노인의 이름은 존 피어폰트 모건, 우리가 아는 J.P. 모건입니다. 당시 미국에는 중앙은행이 없었습니다. 은행이 무너질 때 급한 불을 꺼 줄 공적 기관이 아예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세계 최대의 신흥 경제 대국은 사설 은행가 한 사람의 판단과 체력과 인맥에 금융 시스템을 통째로 맡긴 채 그 가을을 통과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진짜 결말은 모건이 영웅이 되었다는 대목이 아닙니다. 위기가 지나간 뒤 미국의 정치인과 은행가들이 똑같이 떠올린 생각은 이것이었습니다. 다음에도 모건이 살아 있을까. 살아 있다 한들 그때도 옳은 판단을 하리라고 누가 보장하는가. 그 불안에서 출발해, 조지아주 외딴섬의 열흘을 거쳐 1913년의 연방준비제도가 태어납니다.

구리 투기꾼 둘이 무너뜨린 신용

발단은 구리였습니다. 1907년 10월 16일, F. 어거스터스 하인츠와 찰스 W. 모스라는 두 사람이 유나이티드 코퍼라는 회사의 주식을 매점하려다 실패합니다. 매점이란 특정 주식의 물량을 거의 다 사들여 쥔 뒤 값을 마음대로 부르는 수법을 말합니다. 이 작전이 자금 부족으로 무너지자, 두 사람이 돈을 끌어다 쓴 은행들이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손실이 아니라 소문이었습니다. 하인츠와 연결된 것으로 알려진 금융기관마다 예금자들이 창구 앞에 줄을 섰습니다. 10월 18일부터는 뉴욕에서 손꼽히던 니커보커 트러스트 컴퍼니에까지 인출 행렬이 번졌습니다. 신탁회사는 이름과 달리 일반 은행보다 규제가 느슨해, 위험한 곳에 돈을 굴리면서도 지급준비금은 적게 쌓아 두고 있었습니다.

10월 21일, 니커보커는 결제를 대신 처리해 주던 내셔널 뱅크 오브 커머스로부터 더는 도와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22일, 니커보커는 800만 달러가량이 빠져나간 끝에 영업을 중단했습니다. 뉴욕에서 둘째로 큰 신탁회사가 하루아침에 문을 닫자, 사람들은 이제 어느 금융기관도 안전하지 않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공황은 그 순간부터 전국 규모로 커집니다.

모건은 젊은 은행가들을 불러 밤새 장부를 뒤지게 했습니다. 훗날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되는 벤저민 스트롱도 니커보커의 회계를 들여다본 한 사람이었습니다. 검토 끝에 니커보커는 살릴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대신 다음 표적이 된 트러스트 컴퍼니 오브 아메리카에는 돈을 밀어 넣었습니다. 살릴 곳과 버릴 곳을 한 사람이 결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을 뻔한 오후

10월 24일 오후 한 시 삼십 분, 뉴욕 증권거래소 회장 랜섬 토머스가 모건의 사무실로 뛰어들어 옵니다. 거래소를 정규 시간보다 일찍 닫아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증권사들이 콜머니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콜머니란 주식 거래 결제를 맞추기 위해 하루나 이틀 단위로 빌리는 초단기 자금을 말합니다. 그 돈줄이 마르면 거래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모건은 거래소 문을 닫으면 공포가 통제 불능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곧바로 주요 은행장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오후 두 시 십육 분, 은행장 열네 명이 2,360만 달러를 콜머니로 내놓기로 약속했습니다. 소식이 거래소 객장에 전해지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전합니다. 한 사람의 방 안에서 사십오 분 만에 결정된 일이 미국 자본시장의 그날 운명을 갈랐습니다.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날 아침 재무장관 조지 코틀유는 2,500만 달러가량을 뉴욕의 은행들에 예치했습니다. 다만 당시 재무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금고에 있는 돈을 옮겨 놓는 것까지였고, 필요할 때 새로 신용을 만들어 공급하는 권한은 없었습니다. 위기의 크기에 맞춰 대응 규모를 늘릴 수 있는 기관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 그것이 1907년의 핵심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서재의 새벽은 그다음 주말에 벌어진 일입니다. 11월 4일에는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US스틸의 테네시 석탄·철강·철도회사 인수를 승인합니다. 반독점을 내세우던 대통령이 시장을 진정시키려 독점 확대를 눈감아 준 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뉴욕 증권시장은 1906년 1월 고점에서 거의 절반 가까이 내려앉은 뒤였습니다.

한 사람에게 기댈 수는 없다

공황이 가라앉자 미국 사회는 묘한 감정에 빠집니다. 모건은 분명 나라를 구했는데, 바로 그 사실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선출되지도 않았고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민간 은행가 한 명이 어느 회사를 살리고 어느 회사를 죽일지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다음 공황 때 그가 세상에 없다면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인가. 답이 없었습니다.

의회는 1908년 5월 올드리치-브릴랜드법으로 임시 처방을 마련하는 한편, 국가통화위원회라는 조사기구를 만듭니다. 위기의 원인을 따지고 은행 제도를 어떻게 고칠지 연구하라는 임무였습니다. 위원회를 이끈 상원 재정위원장 넬슨 올드리치는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과 독일의 중앙은행 제도를 몇 해에 걸쳐 살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중앙은행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정치적 지뢰였습니다. 19세기 초 두 차례 시도된 국립은행 실험이 모두 정치적 반발 끝에 수명을 연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부와 남부의 농민들에게 뉴욕 월가는 자기들의 농작물값과 대출금리를 주무르는 존재였습니다.

올드리치는 그 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제도 설계를 제대로 하려면 은행이 실제로 어떻게 굴러가는지 아는 사람이 필요한데, 그런 사람은 대부분 월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월가가 만든 법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그 법안은 의회에서 살아남기 어려웠습니다. 이 모순이 다음 장면, 조지아주의 한 섬으로 이어집니다.

오리 사냥을 가장한 열흘

1910년 11월 20일부터 30일까지, 조지아주 앞바다의 지킬섬에서 여섯 사람이 모여 미국 은행 제도 개편안을 짰습니다. 지킬섬은 미국 부호들이 회원제로 운영하던 사냥 클럽이 있던 곳으로, 겨울철이면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숙소와 사냥터가 갖춰져 있으면서도 외부인의 눈에 띄지 않는, 그야말로 맞춤한 장소였습니다.

참석자는 여섯 명이었습니다. 상원 재정위원장 넬슨 올드리치, 재무부 차관보이자 하버드 경제학 교수였던 A. 피아트 앤드루, J.P. 모건 상회의 파트너 헨리 데이비슨, 내셔널시티은행 총재 프랭크 밴더립, 쿤 로엡 상회의 파트너 폴 워버그, 올드리치의 개인 비서 아서 셸턴이었습니다. 정부 인사 둘에 월가 실무자 셋, 기록 담당 하나의 조합이었습니다.

이들은 오리 사냥을 간다고 둘러댔습니다. 뉴저지의 기차역에 각자 따로 도착해 올드리치의 개인 객차에 올라탔고, 열차 안에서는 성을 빼고 넬슨, 해리, 프랭크, 폴, 피아트, 아서라고 이름만 불렀습니다. 승무원이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훗날 참석자들은 스스로를 퍼스트 네임 클럽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오해를 걷어 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회동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 참석자들이 회고록에 남긴 기록도 있습니다. 다만 비밀의 이유는 소박했습니다. 월가가 주도한 법안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 의회를 통과할 수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 계산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자리에서 만들어진 안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거부당했고 그대로 법이 되지도 못했습니다. 밀실에서 무엇이든 관철할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비밀 회동이 법이 되기까지

지킬섬에서 정리된 구상은 올드리치 플랜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됩니다. 전미준비협회라는 단일 기구를 두고 전국에 열다섯 개 지점을 설치해, 회원 은행의 지급준비금을 보관하고 화폐를 발행하며 어음을 할인해 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음 할인이란 기업이 받은 외상 증서를 만기 전에 은행이 이자만큼 깎고 현금으로 바꿔 주는 일을 말합니다. 위기 때 현금이 흘러 들어갈 통로를 상설화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안에는 결정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운영의 주도권이 은행가들에게 있었다는 점입니다. 민주당은 올드리치 플랜 반대를 아예 당 강령에 못 박았습니다. 1912년 대선에서 우드로 윌슨이 당선되면서 정치 지형은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같은 시기 하원의 푸조 위원회는 이른바 머니 트러스트를 조사했고, 1913년 보고서에서 소수의 금융 인사들이 겹치기 이사직을 통해 미국 산업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입니다. 올드리치 플랜을 그토록 비난하던 민주당이 결국 만들어 낸 법안의 기술적 뼈대는 그 안과 상당 부분 닮아 있었습니다. 하원의 카터 글래스와 상원의 로버트 오언이 다듬은 최종안은, 단일 기구 대신 여덟에서 열두 개의 지역 준비은행을 두는 분산형 구조를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대통령이 임명하는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를 올려 공적 통제를 분명히 했습니다.

이사의 임기를 십 년으로 길게 잡은 것도 계산된 설계였습니다. 두 번 연임한 대통령이라도 이사진 전원을 자기 사람으로 채울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킬섬의 안이 통째로 관철된 것이 아니라, 삼 년의 공개 논쟁을 거치며 권력 배분이 다시 짜인 결과물이었습니다.

1913년 12월 23일, 윌슨 대통령이 연방준비법에 서명합니다. 1907년 가을의 공황으로부터 육 년 만이었습니다. 정작 그 공황을 혼자 수습했던 모건은 이 장면을 보지 못했습니다. 푸조 위원회에 불려 나가 증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13년 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에게 의존하던 시대가 끝나는 그해에, 그 한 사람도 함께 퇴장한 셈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오늘날 시장이 매번 금리 결정을 기다리는 그 기관은 누군가의 원대한 설계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은행이 줄줄이 무너지고 증권거래소가 문을 닫기 직전까지 갔던 며칠간의 공포, 그리고 그 공포를 개인의 완력으로 막아 낸 뒤 밀려온 찜찜함에서 나왔습니다. 제도는 대개 이렇게 만들어집니다. 사고가 먼저 나고, 그다음에 규칙이 생깁니다.

지킬섬 이야기가 백 년 넘게 음모론의 단골 소재가 된 것도 곱씹을 만합니다. 참석자들은 법안을 살리려고 비밀을 택했지만, 그 비밀은 제도 전체의 정당성에 두고두고 그림자를 남겼습니다. 공개적으로 설득하는 일을 건너뛴 대가를 백 년 동안 이자까지 쳐서 치른 셈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남는 교훈도 있습니다. 우리가 보는 주가와 금리는 시장 안에서만 정해지지 않습니다. 위기 때 누가 최종적으로 돈을 공급할 권한을 갖는지, 그 권한이 어떤 견제를 받는지가 시장의 바닥을 결정합니다. 1907년의 미국에는 그 장치가 없었기에 개인 은행가의 서재가 중앙은행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니 중앙은행의 결정이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이 오면, 그 기관이 애초에 왜 만들어졌는지 한 번쯤 떠올려 봄 직합니다. 완벽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없던 시절이 더 무서웠기에 만들어진 물건입니다. 제도의 한계를 따지는 일과 제도 없던 세상을 그리워하는 일은 다른 이야기라는 점, 1907년의 그 새벽이 조용히 일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