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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년 은행이 주말에 사라졌습니다

2023년 3월 19일 일요일 저녁,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대통령과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금융감독당국 수장이 한자리에 나왔습니다. 발표 내용은 한 줄이었습니다. 167년 된 크레디트스위스가 같은 나라의 경쟁자 UBS에 팔렸다는 것이었습니다.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전에 끝내야 했기에, 협상은 주말 이틀에 압축돼 있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1856년 스위스의 철도 건설 자금을 대기 위해 세워진 은행입니다. 알프스에 터널을 뚫고 산업을 일으킨 돈이 이곳에서 나왔고, 그 이름은 스위스라는 나라의 자기 이미지와 거의 한몸이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이름값 높은 금융기관 가운데 하나였던 곳이, 시간표상 서른 몇 시간 만에 정리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지금까지도 다툼이 이어지고 있는 대목은 인수 가격이 아닙니다. 손실을 떠안는 순서입니다. 이 은행의 주주들은 적어도 UBS 주식을 조금이라도 받았는데, 특정 채권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채권이 주식보다 먼저 사라진 것입니다.

신뢰는 한 번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2023년 3월의 붕괴는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그 앞에 몇 해에 걸친 사고 목록이 있었습니다. 2021년 이 은행은 아케고스라는 미국 투자회사가 무너질 때 55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 사건은 이 사이트의 다른 칼럼에서 따로 다룬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한 회사의 파산이 왜 이 은행에만 유독 큰 상처를 남겼는지만 기억해두면 충분합니다.

같은 해 영국계 금융회사 그린실이 무너지면서 또 한 번 타격이 왔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그린실이 만든 채권을 담은 펀드를 고객들에게 팔았고, 그 펀드들이 한꺼번에 환매 중단에 들어갔습니다. 물린 고객 자금 규모는 100억 달러 수준으로 거론됐습니다. 손실 자체도 컸지만, 고객 돈을 다루는 판단력에 대한 의심이 남았습니다.

장부에 찍힌 숫자도 나빠졌습니다. 2022년 이 은행의 연간 손실은 73억 스위스프랑으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더 위험한 신호는 손실이 아니라 이탈이었습니다. 2022년 4분기에만 고객 자금 1,100억 프랑 넘게 빠져나갔습니다.

여기서 짚어둘 점이 있습니다. 이 은행은 이 시기에도 규제가 요구하는 자본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습니다. 숫자로 재는 건강 상태는 통과였던 것입니다. 은행이라는 사업은 자본이 모자라서 죽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들이 더 이상 맡기고 싶어 하지 않아서 죽습니다.

방아쇠는 사흘이었습니다

방아쇠는 2023년 3월 둘째 주에 당겨졌습니다. 3월 9일 목요일로 예정돼 있던 연차보고서 공개가 갑자기 미뤄졌습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가 발표 직전에 연락을 해, 2019년과 2020년 현금흐름표에 대해 이미 공개된 수정 사항을 기술적으로 다시 점검해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보고서는 3월 14일에 나왔습니다. 내용에는 2021년과 2022년 재무보고 내부통제에 중대한 취약점이 있었다는 자기 고백이 담겼습니다. 위험을 평가하는 절차와 내부 의사소통에 결함이 있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게다가 고객 자금의 이탈이 아직 반전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숫자를 못 믿겠다는 말과 사람이 떠나고 있다는 말이 같은 문서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튿날인 3월 15일, 최대주주였던 사우디국립은행의 회장 아마르 알쿠다이리가 방송 인터뷰에서 추가로 돈을 넣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절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규제상의 이유를 비롯해 여러 사정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시장이 들은 것은 앞의 네 글자였습니다. 그날 크레디트스위스 주가는 장중 최대 31퍼센트까지 떨어졌습니다. 그는 2주 뒤인 3월 27일 회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타이밍도 최악이었습니다. 불과 며칠 전 미국에서 실리콘밸리은행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그 사건 역시 이 사이트에 따로 정리된 편이 있으니 여기서는 배경으로만 두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장이 이미 은행이라는 단어에 예민해져 있었고, 예금자와 투자자가 무엇이든 의심할 준비가 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500억 프랑으로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3월 16일 목요일, 스위스중앙은행은 크레디트스위스에 500억 프랑 규모의 긴급 유동성을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환율로 550억 달러쯤 되는 큰돈이었습니다. 주가는 하루 반등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미끄러졌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금이 나가는 속도가 자금을 채우는 속도보다 빠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은행에서 돈을 빼려면 사람들이 창구 앞에 줄을 서야 했습니다. 지금은 앱을 열고 몇 초 만에 끝납니다. 뱅크런이라고 부르는 예금 인출 사태의 속도가 통째로 달라졌고, 감독당국이 대응을 고민할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줄었습니다.

그래서 스위스 당국에게 남은 시간은 금요일 장이 닫히는 순간부터 월요일 아시아 시장이 열리기 전까지였습니다. 이 주말 동안 정부와 중앙은행, 금융감독당국 핀마, 그리고 UBS 경영진이 붙어서 결론을 내야 했습니다. 다른 선택지도 검토됐지만, 결국 남은 답은 같은 나라의 더 큰 은행이 통째로 받아가는 것이었습니다.

UBS 입장에서도 내키는 거래는 아니었습니다. 부실이 얼마나 숨어 있는지 주말 안에 다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가 손실 일부를 나눠 지겠다는 약속을 얹었습니다. 인수의 성격이 시장 거래보다 정책 집행에 가까워진 지점이 여기입니다.

주말에 밀어붙인 인수

발표된 조건은 이렇습니다. 인수 가격은 30억 스위스프랑, 당시 기준 32억 달러 수준이었습니다. 크레디트스위스 주식 22.48주를 UBS 주식 1주로 바꿔주는 방식이었고, 주당 가치로는 0.76프랑에 해당했습니다. 며칠 전까지 붙어 있던 주가에 비해서도, 이 은행이 오랫동안 받아온 평가에 비해서도 한참 낮은 값이었습니다.

뒤를 받치는 장치도 함께 나왔습니다. 스위스 정부는 90억 프랑 규모의 손실 보증을 제공하고, 중앙은행은 최대 1,000억 프랑에 달하는 유동성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민간 은행 두 곳의 거래처럼 발표됐지만, 실제로는 국가의 신용이 뒤에서 받쳐준 거래였습니다.

절차는 더 이례적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규모의 합병은 양쪽 주주총회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스위스 정부는 긴급 명령을 동원해 그 절차를 건너뛰었습니다. 자기 회사가 팔리는데 주주들은 찬반을 표시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인수는 그해 6월 12일 마무리됐습니다.

이 주말이 남긴 결과 하나는 스위스 금융 지형의 변화입니다. 오랫동안 두 개의 큰 은행이 나눠 갖던 시장이 하나로 합쳐졌습니다. 너무 커서 무너지게 둘 수 없는 은행을 처리하려고, 더 큰 은행을 만든 셈이 된 것입니다. 이 문제는 지금도 스위스 안에서 논쟁 중입니다.

채권이 주식보다 먼저 사라진 순서

이제 가장 뜨거웠던 대목입니다. 핀마는 3월 19일 같은 날, 크레디트스위스가 발행한 AT1 증권을 전액 상각하라고 명령했습니다. AT1은 은행이 위기에 빠지면 이자 지급이 멈추거나 원금이 주식으로 바뀌거나 아예 없어질 수 있도록 미리 설계해둔, 채권이면서 동시에 자본 역할을 하는 증권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구제에 세금을 덜 쓰겠다는 취지로 널리 도입된 상품이었습니다.

사라진 금액은 약 160억 프랑이었습니다. 당시 기준 170억 달러 남짓입니다. 문제는 금액보다 순서였습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대부분의 나라 제도에서는, 은행이 망할 때 가장 먼저 손실을 보는 쪽이 주주이고 채권 보유자는 그다음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주가 UBS 주식을 받아 무언가를 손에 쥔 반면, AT1 보유자의 몫은 0이 됐습니다.

파장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세계의 AT1 시장 전체가 흔들렸고, 유럽 쪽 감독기구들은 며칠 안에 자신들의 관할에서는 주주가 먼저 손실을 본다는 원칙이 유지된다는 취지의 설명을 서둘러 내놓았습니다. 핀마는 계약서에 적힌 조건과 긴급 명령에 근거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채권자들은 소송을 준비했습니다.

이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2025년 10월 1일 스위스 연방행정법원은 약 3,000명이 낸 소송에서 핀마의 상각 명령을 취소했습니다. 당시 이 은행이 자본 요건을 충족하고 있었으므로 계약상 상각 요건이 갖춰지지 않았고, 명령을 뒷받침할 법적 근거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핀마는 10월 15일 연방대법원에 상고했습니다. 최종 결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첫 번째로 남는 것은 지표와 신뢰의 간격입니다. 크레디트스위스는 마지막 주까지 규제 자본 기준을 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너졌습니다. 재무제표에 찍힌 숫자는 회사의 건강을 재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사람들이 계속 맡기고 싶어 하는지를 재는 척도는 아닙니다. 그 척도는 보고서 바깥에 있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이라는 말의 정체입니다. 많은 사람이 채권은 주식보다 안전하다고 알고 있고, 대체로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안전은 상품 종류가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계약서에 적힌 조항과 위기 상황에서 감독당국이 쓸 수 있는 권한이 결정합니다. 이름이 채권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순서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사건이 가장 비싼 방식으로 보여줬습니다.

세 번째는 시간에 관한 것입니다. 이 은행의 운명은 금요일 저녁과 일요일 저녁 사이에 결정됐습니다. 그 시간 동안 시장은 닫혀 있었고, 보유자들이 판단하거나 대응할 여지는 없었습니다. 금융 사고의 결말이 대개 주말에 쓰이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시장이 열려 있는 동안에는 결론을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167년과 사흘. 이 대비가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오래됐다는 사실, 규모가 크다는 사실,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은 신뢰의 근거가 되어주지만 신뢰 그 자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회사를 믿을 때, 그 믿음이 정확히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한 번쯤 따로 적어볼 만합니다. 오래됐다는 것 말고 무엇이 남는지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