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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세계가 달러를 믿기로 한 3주

1944년 7월 1일, 미국 뉴햄프셔주 깊은 산속에 있는 마운트워싱턴 호텔로 44개국 대표 730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태평양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각국 재무 관료와 경제학자들은 기차를 몇 번씩 갈아타며 이 외진 휴양지로 향했습니다. 이들이 3주 동안 붙잡고 있던 과제는 하나였습니다. 총성이 멈춘 다음 날부터 세계의 돈이 어떤 규칙으로 움직일지를 미리 정해두는 일이었습니다.

서두를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표들의 머릿속에는 1930년대가 생생했습니다. 대공황이 닥치자 각국은 자기 나라 수출품 값을 싸게 만들려고 앞다퉈 통화 가치를 떨어뜨렸고, 동시에 수입품에는 높은 관세를 매겨 문을 닫았습니다. 모두가 같은 수를 쓰자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했고, 세계 무역은 급격히 쪼그라들었습니다. 경제적 궁핍은 정치적 극단으로 이어졌고, 그 끝에 그들이 지금 치르고 있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브레튼우즈에서 결정된 것은 단순한 환율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이 회의에서 세계는 무엇을 믿고 거래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내렸고, 그 답의 자리에 미국 달러가 놓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투자자가 미국 주식을 사려고 원화를 달러로 바꾸고, 원유와 곡물 가격이 달러로 표시되고,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 결정이 서울의 주가를 흔드는 구조. 그 출발점이 바로 이 3주입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기울어 있던 저울

공식 회의는 7월 1일 개막했지만, 실질적인 문안 작업은 그전에 뉴저지 해안의 애틀랜틱시티에서 이미 진행됐습니다. 영국 대표단을 이끈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워싱턴의 한여름 더위를 피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속 호텔이 회의장으로 정해진 이유도 비슷했습니다. 세계 통화 질서의 초안은 서늘한 곳을 찾아 움직인 소수의 실무자들 손에서 먼저 모양을 잡았습니다.

저울은 처음부터 기울어 있었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은 전쟁으로 생산 설비와 재정이 망가진 상태였고, 미국 본토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채 전시 생산으로 오히려 몸집을 키웠습니다. 당시 세계 각국 정부가 가진 금은 400억 달러어치 정도로 추산됐는데, 그중 260억 달러어치가 미국 금고에 있었습니다. 세계 공식 금 보유고의 약 3분의 2입니다. 전후 재건 자금을 빌려야 하는 쪽과 빌려줄 수 있는 쪽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회의 의장은 미국 재무장관 헨리 모겐소 주니어가 맡았습니다. 실무는 세 개 위원회로 나뉘었는데, 국제통화기금을 다루는 제1위원회는 미국 재무부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가, 국제부흥개발은행을 다루는 제2위원회는 케인스가, 제3위원회는 멕시코 재무장관 에두아르도 수아레스가 맡았습니다. 돈이 돌아가는 규칙을 정하는 핵심 위원회를 미국이 쥐고, 재건 자금을 다루는 쪽을 영국에 넘긴 배치였습니다. 자리 배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메시지였습니다.

두 주역의 스타일도 극명하게 달랐습니다. 케인스는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학자였고, 회의를 지독하게 빠른 속도로 밀어붙였습니다. 한 참석자는 조항을 찾아 펼치기도 전에 케인스가 이견이 없는 것으로 알겠다며 통과시켜 버렸다고 회고했습니다. 반면 화이트는 학계의 스타가 아니라 재무부의 실무 책임자였고, 자기 안의 문구를 한 줄도 양보하지 않는 협상가였습니다. 명성은 케인스에게 있었지만 결정권은 화이트 쪽에 있었습니다.

방코르냐 달러냐, 두 설계도의 대결

케인스가 들고 온 설계도는 야심찼습니다. 그는 어느 한 나라의 돈에도 기대지 않는 국제 결제 전용 단위를 새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름은 방코르였습니다. 각국은 국제청산동맹이라는 중립 기구에 계좌를 열고, 무역 대금은 그 계좌에 적힌 방코르 잔액을 주고받는 방식으로 정산합니다. 특정 국가의 통화가 세계의 기준이 되는 일을 처음부터 막아놓은 구상이었습니다.

케인스 안의 진짜 핵심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는 적자국뿐 아니라 흑자국에도 부담을 지우자고 했습니다. 수입을 많이 해서 빚이 쌓인 나라만 허리띠를 졸라매게 하면, 흑자를 쌓아둔 나라는 계속 쌓기만 하고 불균형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흑자 잔액에도 비용을 물려 돈이 다시 돌게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아한 해법이었지만, 당시 세계 최대 흑자국이 어디였는지를 떠올리면 결말은 짐작이 갑니다.

미국 측 설계자 화이트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흑자국에 부담을 지우는 조항에 대해 미국의 입장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1941년부터 다듬어온 안은 국제안정기금이라는 이름이었고, 조정의 짐은 적자국이 지는 구조였습니다. 그리고 세계가 기준으로 삼을 돈은 새로 만든 방코르가 아니라, 이미 세계 금의 3분의 2를 등에 업은 달러였습니다.

협상은 형식상 44개국의 토론이었지만, 빌려야 하는 쪽이 빌려주는 쪽의 설계도를 받아들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케인스는 귀국 후 영국 의회에서 이 합의를 변호해야 하는 처지였고, 그가 지켜낸 것은 체제 전체의 틀이 아니라 그 안의 세부 조항들이었습니다. 방코르는 종이 위에 남았고, 달러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금 1온스에 35달러, 그 뒤에 줄을 선 세계

최종 합의된 구조는 두 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위층에서는 미국만 금과 직접 연결됩니다. 각국 중앙은행이 요구하면 미국은 금 1온스를 35달러에 바꿔주기로 했습니다. 아래층에서는 나머지 나라들이 자국 통화 가치를 달러에 고정하고, 시장 환율이 그 기준선에서 위아래 1퍼센트 범위를 넘지 않도록 관리합니다. 각 나라가 금고에 금을 쌓아두는 대신, 달러와 미국의 약속을 쌓아두는 구조로 바뀐 것입니다.

이 체제를 돌리기 위한 두 기구도 이때 태어났습니다. 환율을 방어할 자금이 떨어진 나라에 급전을 빌려주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전후 재건과 개발 자금을 장기로 대주는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오늘날 세계은행의 모체)입니다. IMF의 초기 출자 총액은 88억 달러로 정해졌고, 각국은 경제 규모에 따라 할당량을 배정받았습니다. 할당량은 곧 의결권이었으므로, 가장 많이 내는 나라가 가장 크게 말할 수 있는 구조였습니다.

이 구조는 한동안 실제로 잘 작동했습니다. 환율이 거의 움직이지 않으니 기업은 몇 년 뒤 수출 대금이 얼마가 될지 계산할 수 있었고, 그 예측 가능성 위에서 무역과 설비 투자가 빠르게 늘었습니다. 폐허가 됐던 서유럽과 일본이 놀라운 속도로 다시 일어선 것도 이 시기입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 체제가 깔아준 바닥이 적지 않은 몫을 차지합니다.

서류에 서명하는 것과 체제가 실제로 돌아가는 것은 별개였습니다. 최종의정서는 1944년 7월 22일 채택됐지만, 출자액 80퍼센트 이상에 해당하는 나라들의 비준이 모이기까지 1945년 12월 27일이 걸렸고, 두 기구의 창립 총회는 1946년 3월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열렸습니다. 소련 대표단은 브레튼우즈에서 최종의정서에 서명은 했지만 끝내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두 기구를 월스트리트의 지점으로 본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세계 통화 질서는 시작부터 서방의 질서였습니다.

계단에서 쓰러진 설계자들

회의 막바지인 7월 19일, 케인스는 호텔 계단에서 쓰러졌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독일 신문들이 그의 부고를 실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사흘 뒤 다시 회의장에 나타나 최종의정서 채택을 직접 제안했습니다. 자신이 가져온 설계도가 대부분 받아들여지지 않은 문서였습니다. 그가 자리를 떠날 때 많은 대표가 일어나 노래로 그를 배웅했다고 전해집니다.

케인스는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된 1946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공교롭게도 서배너 창립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직후였습니다. 그가 걱정한 것은 자기 안이 채택되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보다, 조정의 부담이 한쪽에만 쏠린 체제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느냐였습니다. 그 질문은 그가 죽은 뒤에도 그대로 남았습니다.

미국 측 설계자 화이트의 뒷이야기는 더 극적입니다. 그는 1946년 IMF의 미국 측 초대 이사가 됐지만, 곧 소련에 정보를 넘겼다는 의심을 받게 됩니다. 1948년 8월 13일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에 불려 나가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고, 사흘 뒤인 8월 16일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1995년 미국이 공개한 베노나 해독 전문에는 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암호명이 등장했지만, 그가 어떤 동기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역사가들의 평가가 갈립니다.

설계도에 적혀 있던 모순, 트리핀 딜레마

체제는 처음 10여 년 동안 예상과 반대 방향의 문제를 겪었습니다. 전후 유럽에는 달러가 없어서 미국 물건을 살 수 없었습니다. 이 달러 부족을 메우려고 미국은 마셜플랜으로 유럽에 달러를 쏟아부었고, 서유럽 주요국 통화가 서로 자유롭게 교환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말, 일본 엔은 1964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설계된 대로 온전히 돌아간 기간은 생각보다 짧았습니다.

그리고 달러가 충분히 퍼지자 반대쪽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벨기에 출신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은 1959년 10월 28일 미국 의회에서 이 구조의 급소를 지적했고, 이듬해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세계 무역이 커지려면 거래에 쓸 달러가 계속 세계로 흘러나가야 하는데, 달러가 흘러나간다는 것은 미국이 그만큼 적자를 내고 해외에 달러 빚을 쌓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해외에 쌓인 달러가 미국이 가진 금보다 많아지는 순간, 35달러에 금으로 바꿔준다는 약속은 사실상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됩니다.

세계 경제가 성장할수록 체제의 토대가 얇아지는 구조였던 셈입니다. 달러를 덜 풀면 세계 무역이 돈 부족으로 위축되고, 넉넉히 풀면 달러의 신뢰가 깎입니다. 둘을 동시에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는 것이 트리핀의 지적이었고, 이것이 지금까지 트리핀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1944년 여름의 설계도에는 이 모순이 처음부터 들어 있었지만, 호황기에는 아무도 급한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 지적이 처음 나왔을 때 반응은 미지근했습니다. 체제는 멀쩡히 돌아가고 있었고, 미국의 금고에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금이 들어 있었습니다. 학자 한 사람이 장부를 들여다보고 먼 훗날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들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1960년대 들어 미국의 재정 지출이 크게 늘고 해외로 나간 달러가 쌓이면서, 트리핀이 말한 교차점이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모순이 청구서로 돌아온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습니다. 각국이 정말 금으로 바꿔줄 수 있는지를 하나둘 시험하기 시작했고, 1971년 8월 미국 대통령이 금 창구를 닫으면서 이 체제의 위층은 무너졌습니다. 다만 그 하루의 기록은 따로 다룰 만큼 긴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금과의 연결이 끊긴 뒤에도 브레튼우즈의 유산은 거의 그대로 남았습니다. IMF와 세계은행은 여전히 위기 때 자금을 대는 창구로 작동하고, 각국 중앙은행 외환보유고의 절반을 넘는 몫은 지금도 달러 자산입니다. 원유와 곡물 같은 국제 원자재 가격도 여전히 달러로 매겨집니다. 핵심 약속이 사라진 지 50년이 넘었는데도 달러가 중심에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1944년의 선택이 얼마나 깊이 박혔는지를 보여줍니다.

브레튼우즈가 남기는 첫 번째 교훈은 조금 서늘합니다. 금융 질서는 가장 정교한 이론이 아니라 가장 많은 금을 가진 쪽의 안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케인스는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였지만, 협상장에서 그의 설계도를 밀어낸 것은 더 나은 논리가 아니라 저울의 기울기였습니다. 시장을 볼 때 합리적으로 따지면 이렇게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자주 빗나가는 이유도 비슷한 데 있습니다. 규칙은 옳은 쪽이 아니라 힘이 있는 쪽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교훈은 모순의 시간표에 관한 것입니다. 트리핀이 지적한 급소는 1959년부터 공개돼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체제는 10년 넘게 멀쩡히 돌아갔고, 그 10년 동안은 그 지적이 과장이라는 쪽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렸습니다. 구조적 약점은 보통 발견되는 순간에 터지지 않고, 그것을 버텨주던 조건이 사라질 때 터집니다.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규칙에도 설계상의 전제가 깔려 있고, 그 전제가 흔들리는지를 지켜보는 일이 숫자를 외우는 일보다 오래 유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