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목록으로

정글 속 세계 최대 금맥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1989년 캐나다 캘거리에서 한 남자가 작은 광물탐사 회사를 세웠습니다. 이름은 데이비드 월시, 회사 이름은 브레엑스 미네랄스(Bre-X Minerals)였습니다. 주식은 30센트 안팎에 거래되는 전형적인 동전주였고, 회사 살림은 직원 몇 명이 전부라 할 만큼 단출했습니다. 캐나다 증시에는 이런 탐사 회사가 수백 개씩 있었고, 대부분은 아무것도 찾지 못한 채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7년 뒤, 이 회사의 주가는 캐나다달러로 280달러를 넘어섰습니다. 시가총액은 60억 캐나다달러에 이르렀습니다. 회사가 가진 자산이라고는 인도네시아 보르네오섬 동칼리만탄의 밀림 한복판에 있는 부상(Busang)이라는 탐사 구역 하나뿐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그곳에서 시추한 암석 시료를 분석할 때마다 금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추정 매장량은 해마다 불어났습니다. 200만 온스에서 3,000만 온스로, 다시 6,000만 온스를 넘어 7,000만 온스로 올라갔습니다. 인류가 한 번도 손대본 적 없는 규모의 금맥이 정글 아래 잠들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봄, 독립 감정을 맡은 컨설팅 회사가 한 문장으로 그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부상에는 경제성 있는 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전주 회사가 금맥을 찾았다고 했을 때

브레엑스가 부상 지역 권리를 손에 넣은 것은 1993년이었습니다. 네덜란드 태생의 베테랑 지질학자 존 펠더호프가 그 땅을 추천했고, 현장 탐사는 필리핀 출신 지질학자 마이클 드 구스만이 맡았습니다. 세 사람 모두 그때까지는 업계에서 크게 이름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월시는 이전 사업의 빚을 정리하던 처지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탐사 회사의 사업 방식은 단순합니다. 땅을 빌려 시추기로 땅속 깊이 원통형 암석을 뽑아낸 뒤, 이 코어 시료를 잘게 부숴 분석실에 보내 금 함량을 측정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주가가 오르고, 오른 주가로 새 주식을 찍어 다음 시추 비용을 댑니다. 금을 캐서 버는 것이 아니라 금이 있을 가능성을 팔아 버티는 사업입니다.

1995년 가을부터 부상의 분석 결과가 시장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숫자는 놀라웠습니다. 보통 금광은 암석 1톤에서 금 몇 그램만 나와도 개발할 만하다고 봅니다. 부상의 시료는 그 기준을 넉넉히 넘겼고, 무엇보다 시추공을 어디에 뚫어도 비슷하게 좋은 값이 나왔습니다. 광체가 넓고 고르게 퍼져 있다는 뜻으로 읽혔습니다.

숫자가 스스로 자라기 시작하다

이후 브레엑스가 내놓는 매장량 추정치는 발표할 때마다 커졌습니다. 1995년 200만 온스로 시작한 숫자가 같은 해 3,000만 온스로 뛰었고, 1996년에는 6,000만 온스, 1997년 초에는 7,000만 온스가 됐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2억 온스까지 나올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습니다. 사실이라면 세계 광산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규모였습니다.

주가는 그 숫자를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동전주였던 주식은 토론토증권거래소 본시장으로 옮겨 갔고, 1996년에는 미국 나스닥과 몬트리올 거래소에도 이름을 올렸습니다. 주식분할을 감안해 환산한 최고가는 캐나다달러로 286.50달러였습니다. 30센트짜리 주식을 사서 들고 있던 사람은 수백 배의 수익을 본 셈이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이 주식을 산 것은 개인투자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캐나다 최대 연기금 가운데 하나인 온타리오주 교직원연금이 1억 캐나다달러, 퀘벡주 예금투자공사가 7,000만 캐나다달러, 온타리오 시공무원연금이 4,500만 캐나다달러어치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뉴펀들랜드주 공무원연금과 핼리팩스시 연금도 들어가 있었습니다.

연기금이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가 다시 개인투자자에게 안심의 근거가 됐습니다. 전문가 집단이 검증했으니 믿을 만하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본 자료도 결국은 브레엑스가 제공한 분석 결과였습니다. 코어 시료는 회사 직원들이 현장에서 관리했고, 외부 기관이 독립적으로 다시 시추해 확인한 적은 없었습니다.

정부와 대기업이 끼어들다

금맥이 크다는 소문이 퍼지자 부상은 곧 이권 다툼의 무대가 됐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장기 집권기였고, 대형 광산 개발에는 정권과 가까운 인사들의 지분 참여가 사실상 전제 조건이었습니다. 배릭 골드와 플레이서 돔 같은 대형 광산 회사들도 지분을 노리고 달려들었습니다.

1997년 2월, 마침내 교통정리가 끝났습니다. 미국 광산 회사 프리포트 맥모란이 15%를 갖고 개발을 맡으며, 인도네시아 측이 40%, 브레엑스가 45%를 보유하는 구조였습니다. 브레엑스 입장에서는 지분이 크게 줄었지만, 세계적인 대기업이 파트너가 됐다는 점에서 주주들은 오히려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에는 브레엑스에게 치명적인 조건이 하나 딸려 있었습니다. 프리포트가 개발에 들어가기 전에 자기 손으로 직접 시추해 확인하는 실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부상의 땅속을 확인한 유일한 주체가 브레엑스였다면, 이제 처음으로 다른 회사의 시추기가 같은 자리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1997년 1월 부상 현장에서 불이 나 시료 관련 기록 상당량이 소실됐습니다. 당시에는 그저 열대 오지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고로 넘어갔습니다. 몇 달 뒤 이 화재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히게 됩니다.

헬기에서 떨어진 지질학자

1997년 3월 19일, 현장 책임 지질학자였던 마이클 드 구스만은 부상으로 향하는 헬리콥터에 탔습니다. 이륙 20분쯤 뒤 그는 기내에서 사라졌습니다. 나흘 뒤 밀림에서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현장에서는 급하게 쓴 것으로 보이는 메모가 나왔고, 인도네시아 당국은 스스로 뛰어내린 것으로 처리했습니다.

다만 시신의 상태는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심하게 훼손돼 있었습니다. 열대의 기후와 야생동물 탓이라는 설명이 붙었지만, 치아 기록 대조나 유전자 검사 없이 서둘러 화장이 이뤄졌습니다. 그 뒤로 그가 실제로 사망했는지를 두고 온갖 추측이 따라붙었습니다. 다른 곳에서 목격했다는 주장부터, 누군가 입을 막은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법적으로 확정된 사실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확인된 것은 그가 헬리콥터에서 떨어져 사망한 것으로 처리됐다는 점, 그리고 사망 경위를 두고 지금까지도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가 조작의 주체였다는 내용은 여러 조사 보고서와 언론 보도에 등장하지만, 법정에서 다퉈져 확정된 적은 없습니다.

시료 속의 금가루

3월 하순, 프리포트의 실사 시추 결과가 브레엑스가 발표해 온 수치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습니다. 3월 26일 프리포트는 자사 시추공에서 의미 있는 양의 금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고, 브레엑스도 일부 수치가 과장됐을 가능성을 인정했습니다. 다음 날 주가는 하루 만에 80% 가까이 무너지며 30억 캐나다달러에 육박하는 시가총액이 사라졌습니다.

결정타는 1997년 5월 초에 나왔습니다. 독립 감정을 맡은 캐나다 컨설팅 회사 스트래스코나 미네랄 서비시스는 부상에 경제성 있는 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고서는 시료가 조직적으로 변조됐으며, 이런 규모와 정교함의 조작은 광산 역사에서 전례가 없다고 적었습니다.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 조작이 오랜 기간, 그토록 그럴듯하게 이어졌다는 사실이라는 표현도 담겼습니다.

방식 자체는 허술할 만큼 단순했습니다. 분쇄한 코어 시료에 바깥에서 구한 금가루를 섞어 넣는 것이었습니다. 조사 과정에서는 현지 주민들에게서 사금을 사 모은 정황이 드러났고, 그 금액은 수년에 걸쳐 6만 달러 남짓으로 추정됐습니다. 60억 캐나다달러짜리 회사를 만든 밑천이 그 정도였던 셈입니다. 뒤늦게 확인된 금의 성분은 땅속 광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강바닥에서 걸러낸 사금의 특징을 갖고 있었습니다.

주식은 결국 동전 몇 개 값으로 내려앉았고 거래소에서 퇴출됐습니다. 회사는 파산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연기금들이 입은 손실은 그대로 남았습니다. 그 돈은 어딘가의 은퇴 교사와 시청 직원들의 노후 자금이었습니다.

아무도 유죄가 되지 않은 사기

이 사건의 가장 기묘한 대목은 결말입니다. 캐나다 연방경찰은 수년간 수사한 끝에 1999년 아무도 기소하지 않고 수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조작이 벌어진 장소가 인도네시아 오지였고, 핵심 증거인 시료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핵심 인물이 사망한 상태였다는 점이 이유로 꼽혔습니다.

형사 절차 대신 온타리오증권위원회가 1999년 수석 지질학자였던 존 펠더호프를 증권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내부자 거래 네 건과 허위 공시 관련 네 건, 모두 여덟 건이었습니다. 재판은 8년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2007년 온타리오 법원은 여덟 건 모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판사의 논리는 이랬습니다. 펠더호프가 부상에 큰 금맥이 있다고 실제로 믿었다고 볼 여지가 있으며, 시료 조작이 워낙 정교해 내부에서도 알아채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규제당국은 항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결국 수십억 달러가 증발한 이 사건에서 사기죄로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창업자 데이비드 월시는 1998년 바하마에서 뇌동맥류로 52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펠더호프는 오랜 기간 필리핀에 머물다 2019년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투자자들이 제기한 집단소송은 지루하게 이어지다 2014년 무렵 사실상 정리됐고, 남은 기금은 법률 관련 재단에 넘겨졌습니다. 잃은 돈이 돌아온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브레엑스 사태가 남긴 가장 실질적인 유산은 규제였습니다. 캐나다는 2001년 광물 자원 공시에 관한 새 기준을 도입했습니다. 매장량이나 자원량을 공표하려면 자격을 갖춘 전문가가 이름을 걸고 책임지는 보고서를 첨부해야 하고, 시료 채취와 보관 절차, 분석실 검증 방법까지 문서로 남겨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지금 전 세계 광산 회사들이 따르는 표준은 이 사건의 재발을 막으려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곱씹을 대목은 조금 다릅니다. 브레엑스에서 시장이 본 모든 숫자는 한 회사가 만들어 내놓은 것이었습니다. 시추도 그 회사가 했고, 시료도 그 회사가 관리했으며, 분석 의뢰도 그 회사가 보냈습니다. 검증이라고 불린 절차는 대부분 그 숫자를 다시 계산하는 일이었지 숫자의 출처를 확인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더 불편한 사실은 숫자가 커질수록 의심이 줄었다는 점입니다. 매장량이 200만 온스였을 때는 회의적인 목소리가 있었지만, 7,000만 온스로 커지자 이의를 제기하는 쪽이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규모가 검증을 대신해 준 것입니다. 정교한 전문가 집단인 연기금조차 그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시장에는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근거로 삼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먼 나라의 광구, 아직 공개되지 않은 임상 자료, 계약서를 볼 수 없는 대형 수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만날 때 던져 볼 만한 질문은 하나입니다. 이 숫자를 만든 사람과 이 숫자로 이득을 보는 사람이 같은 사람인가. 부상의 정글에서는 그 답이 같았고, 확인할 방법이 생겼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