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목요일, 월가의 엿새
2026-09-07 · 7분 읽기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오전 10시, 뉴욕증권거래소의 종이 울리자마자 객장은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개장 직후 3분 동안 거래된 주식이 300만 주에 달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하루치에 가까운 물량이 단 3분에 쏟아진 것입니다. 주문을 받아 적던 직원들은 손이 따라가지 못했고, 매도 호가를 외치는 중개인들의 고함이 거래소 건물 바깥 월스트리트 길거리까지 들렸습니다. 그날 한 통신사 기자는 객장의 상태를 '거의 대혼란'이라고 적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아무도 지금 가격을 모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시세는 '티커테이프'라는 가느다란 종이 띠에 전신으로 찍혀 나왔습니다. 전국의 증권사 객장에 놓인 이 기계가 유일한 시세판이었는데, 주문이 폭주하자 기계가 실제 거래를 몇 시간씩 뒤처져 찍기 시작했습니다. 투자자들은 자기가 가진 주식이 지금 얼마인지, 자기가 낸 매도 주문이 얼마에 체결됐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몇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불과 7주 전, 같은 거래소의 주가는 역사상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7주 사이에 무엇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검은 목요일'이라 불리는 그 하루가 왜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는지를 날짜 순서대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영원히 높은 고원'이라는 믿음
1920년대의 미국은 흔히 '광란의 20년대'로 불립니다. 포드의 조립라인이 자동차를 노동자가 살 수 있는 물건으로 만들었고, 라디오라는 새로운 기계가 가정에 들어왔으며, 전기와 냉장고가 생활을 바꿨습니다. 기업 이익은 실제로 늘었고 주가가 오를 이유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문제는 어느 시점부터 주가가 오르는 이유가 '기업이 돈을 벌기 때문'에서 '어제도 올랐기 때문'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1929년 9월 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81.17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그해 여름까지 주식은 더 이상 부자들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발사와 구두닦이가 손님에게 종목을 추천하고, 가정주부가 신문의 시세란을 먼저 펼치는 풍경이 흔해졌습니다. 주식을 사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는 분위기가 몇 년째 이어진 상태였습니다.
이 분위기를 가장 선명하게 요약한 사람은 예일대의 저명한 경제학자 어빙 피셔였습니다. 그는 폭락 직전 '주가는 이제 영원히 높은 고원에 다다른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통계경제학자가 남긴 이 문장은 이후 100년 가까이 시장의 자만을 상징하는 말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피셔 본인도 자기 돈을 주식에 넣어두고 있었고, 폭락 뒤 거의 전 재산을 잃었습니다.
대금의 10%만 내고 사는 주식
이 상승을 끝까지 밀어올린 장치는 '증거금 거래'였습니다. 주식 대금의 전부를 내지 않고 일부만 현금으로 넣은 뒤 나머지를 증권사에서 빌려 주식을 사는 방식입니다. 1920년대 후반의 월가에서는 대금의 10% 전후만 있으면 주식을 살 수 있었습니다. 10만 원짜리 주식을 1만 원으로 사는 셈이니, 주가가 10% 오르면 내 돈은 두 배가 됩니다.
문제는 이 계산이 반대 방향으로도 똑같이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주가가 10% 내리면 내가 넣은 돈은 전부 사라집니다. 그래서 증권사는 담보가 부족해지면 '추가 증거금 요구', 즉 마진콜을 보냅니다. 돈을 더 넣거나, 못 넣으면 증권사가 그 주식을 강제로 팔아버립니다. 하락장에서 이 구조는 '주가 하락 → 마진콜 → 강제 매도 → 추가 하락 → 또 마진콜'이라는 고리를 만듭니다. 누가 겁을 먹어서가 아니라, 계약 조건 때문에 자동으로 팔려 나가는 물량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은행까지 가담했습니다. 은행들은 기업에 대출하는 대신 증권사에 단기자금을 빌려줬고, 증권사는 그 돈을 다시 투자자에게 빌려줬습니다. 중개인 대출 잔액은 1920년대 후반에 수십억 달러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주식 시장과 은행 시스템이 한 줄에 묶여 있었다는 뜻이고, 이것이 나중에 주가 폭락이 은행 위기로 번진 통로가 됐습니다.
10월 23일 수요일, 그리고 24일 목요일
9월 고점 이후 시장은 오르다 내리다를 반복하며 조금씩 고도를 낮췄습니다. 첫 경고는 10월 23일 수요일 오후에 왔습니다. 특별한 악재도 없이 장 후반에 매물이 쏟아지며 시장 전체가 6% 가까이 밀렸고, 마지막 한 시간에만 260만 주가 거래됐습니다. 그날 밤 전국의 증권사는 마진콜 전보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쏟아질 매물이 그 전보 속에 이미 예약되어 있었습니다.
10월 24일 목요일, 시장은 개장과 함께 11% 가까이 주저앉았습니다. 거래량은 1,290만 주에 가까웠는데, 이는 그때까지의 사상 최대 기록이었습니다. 정오 무렵 월가의 거물들이 J.P. 모건 상회 사무실에 모였습니다. 모건 은행의 토머스 라몬트, 체이스 내셔널 은행의 앨버트 위긴, 내셔널 시티 은행의 찰스 미첼, 개런티 트러스트의 윌리엄 포터였습니다. 1907년 금융공황 때 J.P. 모건 본인이 직접 자금을 모아 시장을 멈춰 세웠던 전례를 재현하려는 모임이었습니다.
회의가 끝난 뒤 라몬트는 몰려든 기자들 앞에서 유명한 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거래소에서 약간의 투매가 있었습니다.' 하루에 1,290만 주가 거래되고 시장이 11% 빠진 날의 설명으로는 기이할 만큼 태연한 표현이었고, 그래서 이 말은 지금도 '당국자의 안심시키기'의 대표 사례로 인용됩니다.
그리고 오후 1시 반쯤, 거래소 부이사장이던 리처드 휘트니가 US스틸 입회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은행가들을 대표해 US스틸 2만 5,000주를 주당 205달러에 매수하겠다고 외쳤습니다. 당시 시세보다 한참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그는 이어 다른 대형주에도 같은 방식으로 호가를 던졌습니다. 효과는 극적이었습니다. 그날 다우지수는 6.38포인트, 2.09% 하락으로 마감했습니다. 오전의 공포를 생각하면 사실상 회복이었고, 휘트니는 하루아침에 '월가의 백기사'가 됐습니다.
안도의 주말, 그리고 28일과 29일
다음 날인 10월 25일 금요일은 조용했습니다. 후버 대통령은 '이 나라의 기본적인 산업 활동은 건전하고 번영하는 기반 위에 있다'는 성명을 냈습니다. 10월 26일 토요일은 당시 관행대로 반일장이었는데, 지수가 소폭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주말 신문들은 위기가 지나갔다고 보도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 이틀의 안도가 가장 잔인한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때 '바닥을 잡았다'고 생각하고 들어갔습니다.
안도는 주말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10월 28일 월요일, 다우지수는 38.33포인트, 12.82%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거래소 바닥을 걸어 나오는 백기사가 없었습니다. 은행가들은 다시 모였지만, 지난주처럼 값을 받쳐 주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있는 시장을 유지하는 데까지만 돕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떨어지는 칼날을 맨손으로 잡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10월 29일 화요일, 이른바 '검은 화요일'이 왔습니다. 거래량은 약 1,600만 주로 전날의 기록을 다시 갈아치웠고, 다우지수는 30.57포인트, 11.73% 하락했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을 합치면 23.05%가 사라진 것입니다. 티커테이프는 그날 저녁 7시 45분이 되어서야 낮 동안의 거래를 겨우 다 찍어냈습니다. 증권사 객장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장이 끝난 지 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기 재산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하락은 10월에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다우지수는 11월 13일 198.60으로 내려앉았는데, 9월 3일 고점에서 거의 절반이 날아간 수준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짜 바닥은 거기서 한참 더 아래에 있었습니다. 1932년 7월 8일, 다우지수는 41.22를 기록했습니다. 3년 전 고점에서 89% 이상이 증발한 숫자입니다. 폭락은 며칠이었지만, 하락은 3년이었습니다.
폭락과 대공황은 같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흔한 오해 하나를 짚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1929년 10월의 주가 폭락이 곧 대공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날 경제사학자 대부분은 둘을 구분합니다. 주가 폭락은 방아쇠였고, 대공황은 그 뒤 3~4년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그 사이에 있었던 것은 연쇄 은행 파산과 잘못된 정책이었습니다.
1930년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만 미국에서 은행 608곳이 문을 닫았습니다. 1933년까지 미국 전체 은행 약 2만 5,000곳 가운데 9,000곳 가까이가 파산했습니다. 당시에는 예금자 보호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은행이 망하면 그 안에 있던 예금은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프리드먼과 슈워츠의 유명한 연구는 이 과정에서 미국의 통화량이 3분의 1 이상 줄어들었다고 추정했습니다. 돈이 사라지자 물가가 떨어지고, 물가가 떨어지자 빚의 실질 무게가 늘어나고, 그래서 또 파산이 나오는 악순환이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정책이 불을 끼얹었습니다. 1930년 6월 17일 후버 대통령이 서명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수천 개 품목의 수입 관세를 끌어올렸고, 상대국들의 보복 관세를 불러 세계 무역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1,000명이 넘는 경제학자가 서명 반대 청원을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933년 미국의 실업률은 25%에 이르렀습니다. 네 명 중 한 명이 일자리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후의 사람들과 제도
검은 목요일의 영웅 리처드 휘트니의 뒷이야기는 특히 씁쓸합니다. 그는 폭락 직후 뉴욕증권거래소 이사장에 올라 5년 넘게 월가를 대표했지만, 정작 자기 회사는 투기로 구멍이 나 있었습니다. 그는 거래소 공제기금과 자신이 재무를 맡고 있던 뉴욕 요트 클럽의 돈, 그리고 장인 유산의 채권 약 80만 달러를 손댔습니다. 1938년 3월 10일 횡령으로 기소된 그는 혐의를 인정하고 싱싱 교도소에서 5년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41년 8월 가석방으로 나왔습니다.
제도 쪽에서는 폭락 이후의 의회 조사가 많은 것을 바꿨습니다. 1930년대 초 상원 청문회에서 당시 월가의 작전 세력, 내부자 거래, 은행이 자기 고객에게 부실 증권을 떠넘긴 관행들이 줄줄이 드러났습니다. 그 결과 1933년에는 은행업과 증권업을 분리한 법이, 1934년에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만들어졌습니다. 기업이 투자자에게 재무 정보를 제대로 공시해야 한다는, 지금은 너무 당연해 보이는 원칙이 이때 법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증거금 규제입니다. 10%만 내고 주식을 살 수 있던 관행은 사라지고, 신용으로 살 수 있는 비율에 상한이 생겼습니다. 주가가 일정 폭 이상 떨어지면 거래 자체를 잠시 멈추는 '서킷 브레이커'는 한참 뒤인 1987년 블랙먼데이 이후에 도입됐지만, 그 발상의 뿌리는 1929년 10월입니다. 패닉이 패닉을 부르는 고리를 어디서든 한 번 끊어 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1929년 10월의 기록을 날짜별로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검은 목요일'이 사실 반등으로 끝난 날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날 오후 지수는 고작 2% 하락으로 마감했고, 다음 날 신문은 위기가 끝났다고 썼습니다. 진짜 붕괴는 사람들이 안심한 그 주말을 지나 월요일과 화요일에 왔습니다. 급락 하루에 들어온 반등은 추세의 전환일 수도 있고 단지 숨 고르기일 수도 있다는 것, 그 둘은 당시에는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엿새가 남긴 가장 실질적인 교훈입니다.
두 번째는 빌린 돈의 성질입니다. 1929년의 투매 상당 부분은 투자자가 팔기로 결정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담보가 부족해서 자동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빌려서 투자하면 내 판단의 유효기간이 내 담보가 버티는 기간으로 줄어듭니다. 시장이 옳은 방향으로 가더라도 그 전에 담보가 먼저 바닥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증거금 비율이나 대출 조건이 숫자로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을 적어 놓은 계약서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은 가장 권위 있는 목소리도 틀린다는 사실입니다.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가 '영원히 높은 고원'을 말했고, 월가 최고의 은행가가 '약간의 투매'라고 말했으며, 대통령이 '건전한 기반'을 말했습니다. 세 사람 모두 거짓말을 할 의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그들도 그 순간 안에 있었습니다. 시장이 크게 흔들릴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찾는 것이 권위 있는 사람의 한마디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엿새의 기록은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꽤 불편하게 읽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