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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값이 네 배 뛴 날, 세계가 배운 것

1973년 겨울 미국의 주유소에는 똑같은 안내판이 걸려 있었습니다. 이 줄의 마지막 차까지입니다. 그 뒤에 선 사람은 몇 시간을 기다렸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기름을 넣으려고 줄을 서서 공회전하는 차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연료가 15만 배럴에 달한다는 추정까지 나왔습니다. 기름을 구하려고 기름을 태우는 상황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 세계 원유 가격은 배럴당 3달러 안팎이었습니다. 1974년 1월에는 11.65달러가 됐습니다. 네 배에 가까운 상승입니다. 산업혁명 이후 서구 경제가 값싼 에너지를 전제로 쌓아 올린 모든 계산이 한꺼번에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10년이 특별한 이유는 기름값이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당시 경제학 교과서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던 현상이 실제로 벌어졌고, 그 결과 각국 중앙은행의 역할과 에너지 정책, 자동차 산업의 지형, 그리고 산유국의 국제적 위상까지 전부 다시 쓰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이 석유를 무기로 만들다

시작은 전쟁이었습니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며 4차 중동전쟁이 터졌습니다. 유대교 명절인 욤 키푸르에 공격이 시작됐기 때문에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군사 지원을 결정하자 아랍 산유국들은 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반격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10월 16일 쿠웨이트에 모인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은 원유 고시가격을 70퍼센트 인상한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습니다. 배럴당 3.01달러에서 5.11달러가 됐습니다. 그동안 가격은 서구의 거대 석유회사들이 정해왔는데, 처음으로 산유국이 소비국과 협상하지 않고 값을 정한 것입니다. 석유 역사에서는 이 하루를 가격 결정권이 넘어간 날로 봅니다.

다음 날부터 아랍석유수출국기구는 미국과 네덜란드 등 이스라엘을 지원한 나라들에 대한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매달 생산량을 단계적으로 줄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금수 조치는 1974년 3월까지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고시가격은 1974년 1월 1일 11.65달러로 다시 뛰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그 전에 이미 무너진 국제 통화 질서가 있었습니다. 1971년 미국이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약속을 중단한 뒤 달러 가치는 꾸준히 떨어졌고, 달러로 기름을 팔던 산유국들은 같은 양을 팔아도 손에 쥐는 실질 가치가 줄어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전쟁은 계기였을 뿐, 불만은 이미 쌓여 있었던 셈입니다.

주유소 앞의 겨울

석유 수입에 의존하던 미국과 유럽, 일본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습니다. 미국 여러 주는 자동차 번호판 끝자리가 홀수인 차와 짝수인 차의 주유 가능한 날을 나누는 조치를 도입했습니다. 간호학과 학생이 기름을 채우느라 하루를 다 썼다는 증언이 남아 있을 정도였습니다. 줄 끼어들기를 두고 주먹다짐이 벌어지고 총이 등장했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정부는 쓸 수 있는 수단을 모두 꺼냈습니다. 1974년 1월 2일 닉슨 대통령은 전국 고속도로의 최고속도를 시간당 55마일로 제한하는 법에 서명했습니다. 일부 구간에서는 기존 제한속도가 80마일이었으니 상당한 변화였습니다. 1973년 12월에는 일광절약시간제를 1년 내내 적용하는 조치도 시행했는데, 아이들이 어두운 새벽에 등교한다는 불만이 터져 열 달 만에 폐기됐습니다.

경유값 급등에 분노한 트럭 운전사들은 1973년 12월부터 고속도로를 막고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일하러 나간 동료의 타이어를 찢고 총을 쏘는 일까지 벌어진 끝에 대부분이 1974년 2월에 복귀했습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난방 온도를 낮춰달라고 호소했고, 몇 년 뒤 카터 대통령은 카디건을 입은 채 같은 부탁을 반복했습니다. 이 겨울의 기억은 숫자보다 오래 남았습니다. 기름이 끊기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선진국 국민들이 처음으로 몸으로 겪은 시기였고, 이후 수십 년간 에너지 정책 논쟁의 밑바닥에는 1973년 겨울의 주유소 줄이 깔려 있었습니다.

교과서가 설명하지 못한 조합

경제학자들을 당황시킨 것은 물가 상승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까지 주류 경제학은 필립스 곡선이라는 관계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실업률이 낮아지면 물가가 오르고, 실업률이 오르면 물가는 떨어진다는 역의 관계입니다. 즉 물가와 실업 가운데 하나를 잡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선택의 문제로 이해했습니다.

1970년대에는 둘이 함께 올랐습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4년 11퍼센트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1975년 5월에 9퍼센트에 닿았습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성장률은 플러스에서 마이너스로 꺾였습니다. 이론적으로 있을 수 없어야 하는 조합에 정체를 뜻하는 스태그네이션과 인플레이션을 합친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원인은 이전과 성격이 달랐습니다. 보통의 물가 상승은 수요가 넘쳐서 생깁니다. 반면 1970년대의 물가 상승은 에너지라는 모든 산업의 원가가 한꺼번에 올라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릅니다. 원가가 오르면 기업은 가격을 올리면서 동시에 생산과 고용을 줄이므로, 물가와 실업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증시는 먼저 반응했습니다. 1973년 1월 11일 1,051까지 올랐던 다우존스 지수는 1974년 12월 6일 577.60까지 밀려 45퍼센트 이상을 잃었습니다. 영국 증시의 하락폭은 그보다 훨씬 커서 고점 대비 73퍼센트에 달했고, 홍콩 항셍지수는 1,800에서 300 부근까지 주저앉았습니다. 주요 7개국 증시는 실질 가치 기준으로 평균 43퍼센트가 사라졌습니다.

석유가 만든 새로운 부자들

소비국이 잃은 돈은 어디로 갔을까요. 산유국으로 갔습니다. 1974년부터 1981년까지 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들이 쌓은 경상수지 흑자는 약 4,500억 달러로 추산됩니다. 그 가운데 90퍼센트 가까이가 페르시아만 연안 아랍 국가들과 리비아에 집중됐습니다. 사막의 왕국들이 하루아침에 세계 금융시장의 주요 자금 공급자가 된 것입니다.

이 돈은 금고에 쌓이지 않았습니다. 미국 국채로, 유럽과 스위스와 영국의 대형 은행 예금으로 흘러들었습니다. 은행들은 이렇게 받은 돈을 다시 기름값 폭등으로 외화가 부족해진 개발도상국에 빌려줬습니다. 석유로 번 달러가 금융시장을 돌아 다시 석유를 사는 나라로 가는 이 순환을 오일달러 재순환이라고 부릅니다.

결과는 양면적이었습니다. 당장 도산을 피한 나라들이 많았지만, 빚은 눈덩이처럼 커졌습니다. 국제통화기금 추산으로 석유를 수입하는 개발도상국 100개국의 대외 부채는 1973년부터 1977년 사이에 150퍼센트 늘었습니다. 1980년대 중남미를 휩쓴 외채 위기의 씨앗이 이 시기에 뿌려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산유국이 벌어들인 돈은 건설 공사로도 풀려나갔습니다. 항만과 도로, 발전소, 신도시 공사가 중동 전역에서 동시에 발주됐고, 이 발주 물량을 따내려는 세계의 건설회사들이 모래바람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충격과 볼커의 극약처방

세계가 첫 충격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때 두 번째가 왔습니다. 1978년 11월 이란의 석유 노동자 파업으로 하루 600만 배럴이던 생산량이 150만 배럴로 줄었고, 1979년 1월 16일 팔레비 국왕이 이란을 떠났습니다. 세계 전체 공급 감소는 4퍼센트 정도였지만 가격은 그보다 훨씬 크게 움직였습니다. 원유는 배럴당 39.50달러까지 올랐고, 이 실질 가격 기록은 2008년 3월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1979년 7월 15일 카터 대통령은 미국이 자신감의 위기에 빠졌다는 연설을 하고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습니다. 백악관 지붕에는 태양열 집열판이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호소와 상징으로 10년에 걸쳐 굳어진 물가 기대심리를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9년 11.3퍼센트, 1980년 13.5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고리를 끊은 사람은 1979년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된 폴 볼커였습니다. 그는 경기가 얼마나 나빠지든 감수한다는 태도로 기준금리를 20퍼센트 선까지 끌어올렸습니다.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되자 건설과 제조업이 주저앉았고, 미국 실업률은 1982년 말 10.8퍼센트까지 올랐습니다. 분노한 농민과 건설업자들이 연준 건물 앞으로 트랙터와 목재를 몰고 오는 장면까지 연출됐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심리가 꺾였습니다.

한국이 두 번 맞은 충격

석유를 거의 전량 수입하던 한국에 이 10년은 특히 가혹했습니다. 1973년 3.5퍼센트였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1974년 24.8퍼센트로 뛰었고, 성장률은 12.3퍼센트에서 7.4퍼센트로 내려앉았습니다. 1973년 12월 4일 정부는 대통령 긴급조치로 석유류 가격을 30퍼센트 인상하고 관련 품목 가격을 함께 조정했습니다. 학교 휴업과 차량 운행 제한 같은 절약 조치도 동원됐습니다.

가계의 체감은 숫자로도 남았습니다. 1973년에서 1974년 사이 서울의 자가용 등록 대수는 5만 4,331대에서 4만 4,813대로 9,500대 이상 줄었습니다. 기름값을 감당하지 못해 차를 처분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입니다.

반대편에는 기회도 있었습니다. 중동 산유국의 발주 물량을 한국 건설업체들이 대거 수주하면서 외화가 들어왔습니다. 1976년 현대건설이 따낸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계약 금액이 9억 6천만 달러로, 당시 한국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였습니다. 기름값 때문에 빠져나간 달러를 기름값 때문에 생긴 공사로 벌어 오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두 번째 충격은 더 아팠습니다. 첫 충격 이후 산업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 충분하지 않았던 데다 국내 정치 격변까지 겹쳤습니다. 1980년 한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퍼센트에 달했고, 경제는 산업화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습니다. 그 뒤로 에너지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비축 체계를 갖추는 일은 한국 경제정책의 상수가 됐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남는 것

이 10년은 제도를 남겼습니다. 1974년 11월 선진 소비국들은 공동 대응 기구인 국제에너지기구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은 1975년 12월 에너지정책보존법을 통해 전략비축유 제도를 도입하고 동시에 자동차 연비 기준을 법으로 정했습니다. 1977년에는 에너지부가 신설됐습니다. 위기를 겪기 전에는 아무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장치들입니다.

산업 지형도 바뀌었습니다. 연비 좋은 작은 차를 만들던 일본 업체들에게 이 위기는 결정적인 기회였습니다. 미국 자동차 판매에서 일본 수입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15.3퍼센트에서 1980년 26.7퍼센트로 올랐습니다. 소비자의 선택이 바뀌는 데 10년이 걸렸고, 그 변화는 그 뒤 40년간 되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깊은 변화는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물가가 좀 오르는 것은 감수할 만하다는 낙관론이 이 시기에 완전히 깨졌습니다. 한번 굳어진 물가 기대심리를 되돌리는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확인한 뒤, 각국은 중앙은행을 정치에서 떼어내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 독립 기관으로 다시 설계했습니다.

투자자에게 남는 것은 조금 다른 교훈입니다. 1972년의 어떤 전망 보고서에도 기름값이 네 배가 되는 시나리오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위기는 예측한 변수에서 오지 않고, 모두가 당연하다고 전제해 아예 변수로 취급하지 않던 것에서 왔습니다. 값싼 에너지, 안정된 환율, 낮은 물가가 그런 전제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며 계산에서 빼놓고 있는 전제는 무엇인지, 1970년대는 그 질문을 던지라고 남아 있는 10년입니다.